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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벼리 Oct 23. 2023

고장 난 브레이크

에세이-이뻔소


 은희라는 여자에게서 계속 전화가 온다. 그녀는 텔레마케터 은희가 아니다. 옥수수를 좋아한다던 텔레마케터 은희는 퇴사한 지 오래다. 그녀와 통화를 하면 스트레스로 속이 울렁거리고 구토가 나올 것만 같다.


 가슴이 답답해 바다에 가고 싶었다. 퇴근길에 김 과장에게 물었다.

 "근처에 바닷가 있어요?"

 "바다는 왜요?"

 "그냥... 답답해서요. 바다 보러 가면 속이 좀 편해지려나 해서 물어본 거예요."

 "근처에 바다가 있긴 있죠... 지금 갈래요?"

 "지금요? 에이~ 이 시간에 무슨 바다를 가요. 깜깜해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갑시다! 바다!!"

 "진짜요?"

 "조금만 가면 시화방조제 있는데 거기 가면 바다 볼 수 있죠!"

 "가까워요? 정말 갈 거예요?"

 "가고 싶다면서요? 갑시다!!"


 김 과장은 시화방조제 중간에 작은 공원에 차를 세웠다. 어둠이 짙어 바다는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충분했다. 풍경을 감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숨을 쉬고 싶었던 것이다.

 주위는 찰방거리는 파도소리뿐 인적 없는 바다는 고요하기만 하다. 잔디에 홀로 앉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한참 넋을 놓고 있다가 마음을 추슬렀다. 한 시간은 지난 모양이다. 혼자가 아니었다는 생각에 그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찍이 잔디 위에 그가 누워서 자고 있었다.

 "우와! 어떻게 이런 데서 잠을 자지?"

 바람이 제법 찬데 잠든 그가 신기해 얼굴을 내려다봤다. 고마웠다. 바다에 데려다준 것도, 한 시간 넘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 준 것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까지...


 나는 자주 가슴이 답답했고 그럴 때마다 김 과장은 시화방조제로 차를 몰았다. 함께 갔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바다를 보면 조금씩 숨이 트였고 무거움을 덜어내고 나니 말없이 곁을 지켜 주는 그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퇴근길 차에서 내리며 김 과장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차 창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며 그가 나를 불었다.

 "주희 씨! 맥주 한 잔 할래요?"

 "맥주요? 음...... 글쎄요... 술 생각 별로 없는데..."

 "요 앞에서 생맥주 한 잔만 하고 갑시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받은 것이 많으니 거절할 수 없었다.

 회식 이후로 그와의 술자리도, 둘만의 긴 대화도 처음이었다. 술을 앞에 두니 그는 말이 많아졌다. 묻지도 않은 삼국지에 대해 주절주절 떠들며 관심 없고 재미없는 대화로 표정이 굳어가는 줄도 모르고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빵실거린다.


 필요 이상의 친절을 느낄 때마다 '과장님한테 관심 없습니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꺼내 선을 그었지만 그는 '저도 관심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라며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말할 때마다 아니라고 잡아 때니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오늘 나만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아! 이 남자가 나를 진짜 좋아하는구나!'

 '같이 야근하자는 것도, 옥수수를 사러 가자고 했던 것도, 집까지 태워다 주는 것도 다 같이 있으려고 만든 핑계구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닫힌 마음에 누군가가 들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 내 눈에 자꾸 이 남자가 들어오려 하지만 마음에 닿지는 않는다.

 '그럼... 그냥 눈에만 담아볼까?'

 하자는 대로 잘 따라주고 별로 상처받는 것 같지도 않은데 적당히 이용해 봐야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해봤다.


 관심 없다더니 아주 조금 호의적으로 바뀐 나의 태도에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퇴근길에 차에서 대화를 나누다 '귀여운 구석이 있네?'라는 생각이 들어 불쑥 장난스러운 말을 던지고 말았다.

 "아유~ 귀여우셔서... 오늘은 제가 좀 깨물어 줘야겠네요!"

 "에???? 깨물어 준다고요?......"

 하필이면 왜 깨문다는 표현을 썼는지 나도 모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앞만 보고 급하게 운전하더니 갑자기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내게로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아!! 뭐 하시는 거예요?? 미쳤나 봐!!!"

 "깨물어 준다면서요!"

 "깨물어 준다고 했지 누가 키스한다고 했어요?"

 "어???? 그게 그거 아니에요?? 그럼 깨물어 준다는 말은 뭐예요?"

 "예뻐해 준다는 거죠!!!"

 "아!!!! 그래요?? 아~~ 나는 또!!...... 아이고~~ 운전하다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나의 장난스러운 한마디에 그의 브레이크는 완전히 고장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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