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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벼리 Oct 23. 2023

새로운 시작

에세이-이뻔소


 스물여섯이었다. 이제서 대학을 졸업하고 휴학시절 일했던 웹디자이너로 취직하려고 경기도 군포에 있는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장마가 한창이던 여름날 면접 보러 가는 길에 장대비는 쉬지 않고 쏟아졌다.

 작은 건설회사였다. 새로 생긴 인터넷 사업부에 과장과 프로그래머, 텔레마케터 둘을 포함해 모두 네 명이었고 디자이너 한 명을 더 뽑고 있었다.


 며칠 뒤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고 미용실에 가 머리를 최대한 짧게 잘랐다. 밝게 염색했던 단발머리에 새까맣게 자란 검은 머리가 대조를 이뤄 보기 싫었고, 매일이 우울했던 나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첫 출근날 사무실에 들어서니 면접 때 봤던 그 남자가 회의실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작은 눈이 갑자기 커지더니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뭐지? 저 눈빛은?'

 남자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모른 척하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나를 한참 바라보던 그는 밝게 웃었다.

 "아! 안녕하세요! 머리를 잘랐네요?"

 머리는 짧게 잘랐지만 푸른 꽃무늬 가득한 민소매 블라우스에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온 흰색 스커트가 발랄했다.

 그 남자는 자신은 과장이고 이름은 김민수라고 소개했다.


 김 과장은 매일 야근을 했다. 바쁘지도 않은데 왜 매일 야근을 하는지 궁금했다.

 "김 과장님은 왜 맨날 야근하시는 거예요? 일이 그렇게 많아요?"

 "어... 바쁜 건 아닌데! 우리 회사는 건축회사라 일찍 오면 아침도 주고 야근하면 저녁밥도 줘요! 그래서 그냥 저녁 먹고 가려고 조금 더 일하다가 가는 거예요!"


 며칠 뒤 김 과장은 혼자 일하기 심심하다며 같이 야근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일한다면서 심심한 건 또 뭐야?'

 웹디자인은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이 아니었다. 일이 즐거울 리 없었고,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지만 그냥 야근은 하기로 했다. 시흥에 작은 방을 얻어 여동생과 둘이 살고 있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일로 마음이 뒤숭숭해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김 과장은 같이 야근한다는 이유로 퇴근길에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한 시간 걸리는 고단했던 지하철 퇴근길이 편해지겠구나 싶어 좋아라 얻어 타고 다녔지만 그가 30분 거리의 자기 집을 두고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우리 집에 들렀다가 다시 자기 집에 도착하기까지 총 한 시간 30분을 운전하는 미련한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뭐지 이 남자는? 왜 먼 길을 돌아서 굳이 나를 태워다 주고 가는 거지?'

 의심스러웠다. 첫 출근날 심하게 흔들렸던 동공도, 같이 야근하자는 것도, 일부러 차를 태워주며 멀리 돌아서 가는 것까지.

 "김 과장님! 혹시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아닌데요. 관심 없는데요."

 "근데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 한테도 다 잘해 주는데요?"

 "그럼 왜 태워다 줘요?"

 "야근하니까 태워다 주죠."

 "아닌데? 뭔가 이상한데?"

 "......"

 "저는 사내 커플 같은 건 절대 안 할 거고요. 김 과장님한테도 관심 없어요!"

 "네~ 그렇게 하세요!"


 김 과장은 나보다 한 살 어린 텔레마케터에게도 유난히 친절했다. 그녀는 김 과장에게 싸늘했고 김 과장의 친절에 싫은 티까지 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운전하던 김 과장이 물었다.

 "옥수수 어디서 파는지 알아요?"

 "왜요? 옥수수 쪄 드시게요?"

 "아뇨. 누가 옥수수를 좋아한다고 해서 사다 주려고요."

 나는 옥수수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가 말하는 누구는 나는 아닌 것이다.

 "누가 옥수수를 좋아하는데요?"

 "있어요~ 누구."

 "아~ 은희 씨구나!"

 텔레마케터 그녀의 이름은 은희였다.

 "어?? 어떻게 알았지??"

 "다 티 나거든요!! 그렇게 티를 많이 내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요? 

마트 가면 팔겠죠~ 저희 집 앞에 조그만 마트 하나 있는데 거기 들렀다 가시던가요!"

 "옥수수 사다 주면 좋아할까요??"

 "글쎄요... 삶은 옥수수도 아니고 직접 삶아 먹으려면 귀찮을 텐데 좋아할까요?"

 "같이 가서 좀 골라 줄래요?"

 "제가요? 제가 왜요? 그냥 혼자 가세요~"

 "제가 옥수수 고를 줄 몰라서 그러는데... 같이 갑시다!"

 "저도 모르거든요!"

 결국 마트에 같이 갔다. 옥수수는 보이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으니 옥수수 시즌이 지나 내년 여름에나 판매한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줄 옥수수를 살 거면 혼자 갈 것이지... 왜 나더러 골라 달라는 건지... 이 남자도, 이 남자가 좋아한다는 그 여자도 관심 없는데 남의 연애사가 묘하게 기분 나빴다. 마트에서 툴툴거리는 나를 보며 김 과장은 자꾸 실실거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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