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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벼리 Dec 07. 2023

소심이에게 분노할 명분이 주어진다면?

에세이-이뻔소


 초보운전 시절이었다. 아파트 주차자리 아닌 곳에 주차한 차 때문에 차를 뺄 수 없었다. 차 좀 빼 달라는 전화를 했다.

  남자는 이중주차도 아닌데 왜 전화했냐고 화를 내며 끊었다. 계속 전화를 하자 주차장으로 내려온 남자는 거꾸로 빠져나가면 되지 않냐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욕 세례에 놀라 멍하니 듣고만 있다 뒤늦게 화가 나 제대로 따지지도 못했다. 집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하니 남편이 하는 말.

 "싸우지 말고 그냥 들어와!!"

 다혈질의 욕쟁이 남자는 계속 혼잣말로 욕을 신나게 뱉으며 차를 빈자리에 주차하고 들어가 버렸다. 어처구니없는 욕 세례에 화가 난 나는 집으로 올라가 남편에게 따졌다.

 "자기는 왜 나와 보지도 않아? 주차문제로 시비가 붙었으면 나와서 봐주던가 내편을 들어주던가 해야지! 내가 욕먹고 있다는데 왜 가만히 앉아있어?"

 "내가 나가면 싸움밖에 더 돼?"

 "어!! 싸움 나더라도 나와서 편을 들어줬어야지!"

 "자기가 초보라서 차를 못 빼서 그런 거겠지......"

 "그건 나와서 따져 볼일이고! 주차자리도 아닌 데다 주차해 놓고 차 빼달라고 한다고 그게 욕할 일이야? 너는 열도 안 받니?"

 나는 나름 평화주의자다. 싸움은 최대한 피하고 좋게 넘어가려 애쓰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부당한 대우나 불의까지 참지는 않는다. 그에 반해 남편은 불의를 보고도 우직하고 굳세게 참아내는 극 현실적인 평화주의자로 대단한 내공의 소유자다.


 낚시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우리는 종종 가두리 낚시터에 갔다.

 그날은 방갈로에 자리가 없어 천막하나 달랑 있는 자리에서 낚시를 하게 되었다. 옆자리의 남자가 쉴 새 없이 담배를 피워댄다. 방갈로에 들어가면 담배연기를 피할 수 있겠지만 뻥 뚫린 천막은 피할 길이 없었다. 참다못해 남편에게 속삭였다.

 "자기야! 애들 계속 기침하는데 옆사람한테 멀리 가서 피우라고 말 좀 해봐!"

 "......"

 "자기야~ 가서 말 좀 해보라고!!"

 "애들한테 저만치 가 있으라고 해!"

 "앉아서 계속 줄담배를 피는데 어디로 가 있으라고??"

 "담배 피울 때만 그냥! 저만치 가 있으면 되지!"

 "자기야! 개인이 돈 주고 빌린 자리라고 해도 여기는 공공장소잖아? 애들 있는 거 알면서 옆에서 담배를 저렇게 피우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니?"

 "다른 사람들도 다 앉아서 피워!"

 "자기는 저만치 나가서 피우잖아!"

 "그건 우리 애들이니까 그런 거고!"

 "그래! 그러니까 애들 위해서 부탁한다고 말이라도 좀 해 보라고~ 목 따갑다고!!"

 "어! 나는 못해! 그럼 네가 해!"

 "허!!!!! 참 나!!"

 결국 나는 옆자리 남자에게 다가가 정중히 부탁했다. 아이들이 있으니 배려해 달라고...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담배를 끄더니 멀리 나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잠시 뒤 남자는 막 잡은 물고기 한 마리를 들고 와 우리 앞에 내려놓고는

 "애들 주세요!"

 라고 무뚝뚝한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남편은 그런 남자에게 허허 웃어 보이며 세상 좋은 사람인 양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다시는 낚시터에 같이 오지 않겠다고! 그 비싼 낚시비도 이제는 네 용돈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남편의 이런 평화주의가 나의 분노를 산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말이 평화주의지 내게는 소심쟁이의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런 소심하고, 비겁하고, 극 현실적인 평화주의자가 불같이 화내며 사람을 쥐 잡듯이  잡는 일이 있었다.

 

 유방암 진단을 받고 항암 치료 중이었던 시어머니의 간암 전이 소식이 들려왔다. 남편의 마음은 말로 표현 못할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달랠 수 없는 슬픔은 분노가 되어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위태로웠다. 술을 마시고 허구한 날 시비를 걸어왔지만 대응하지 않고 피했다. 받아주거나 풀어 줄 수 있는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우리 집은 아파트 1층 기계 주차장 바로 위 2층이었다. 종일 기계 돌아가는 소음과 진동이 집안을 흔들었다. 앞건물에 가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집이지만 이전 집보다 꽤 넓고 저렴해서 이사 들어올 때는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며칠 밤을 지내고 나니 이 집이 왜 싸게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새벽이면 기계주차장 덜컹거리는 소리와 진동이 더욱 크게 느껴져 잠귀 밝은 나는 잠을 자주 설쳤다.


 둘째를 임신하고 입덧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입덧에 잠까지 설치니 건강은 날로 나빠지고 있었다. 남편은 기계주차장의 진동과 소음을 고려하지 않고 집을 지은 것과 준공허가를 내준 것까지 문제가 있다며 구청에 민원을 넣기 시작했다. 구청에 항의 전화를 하는 과정에서 고성이 여러 번 오갔다. 계속된 민원에 구청에서는 소음을 측정해 보겠다며 집으로 찾아왔다. 생각보다 높은 데시벨이 나왔고 새벽에는 더 할 것이니 건설사와 합의해서 해결하라는 결론을 내려 주고 갔다. 열쇠는 우리 손에 쥐어졌으니 이제 합의만 남았다.

 

 사실 아파트를 지은 건설사는 이미 부도난 상태였고 건물은 인수한 건축회사에서 분양한 것이다. 직접 건축한 것은 아니지만 명백한 하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양했으니 책임은 져야 했다.

 소장쯤 되어 보니는 나이 지긋한 남자가 합의를 원한다며 집으로 찾아왔다. 남편과 식탁에 마주 앉은 남자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이다. 남편이 험악한 표정으로 남자의 얼굴에 대고 삿대질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 이 집 어떻게 할 거야! 어? 어디 이따위 집을 돈을 주고 팔아 처먹어! 어? 우리 와이프 배 속에 애는 어떻게 할 거야! 어? 내 새끼 죽일 참이야? 우리 와이프 상태가 어떤지 눈 있으면 좀 봐봐!! 어? 내 새끼 죽으면 당신이 책임 질 자신 있어???"

 차마 다 쓰지 못하고 입에 담지 못할 육두문자까지 섞어가며 남편은 머리 꼭대기까지 끌어올린 분노의 폭탄으로 남자를 맹공격했다.


 나는 첫째 때보다 더 심한 입덧으로 거의 먹지 못해 피골은 상접하고 눈은 퀭한 데다 잠까지 제대로 자지 못하니 얼굴은 새까맣고 거친 것이 딱 중증 환자였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비실 거리는 나를 본 남자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신이 봐도 원만한 합의는 불가능해 보였던 모양이다.

 뭐라 참견은 못하고 멀찍이 앉아 남자를 지켜봤다. 험악하고 듣기 거북한 말들이 남자의 멘털을 흔들고 온 집안을 흔들었다. 식탁 밑으로 감춰진 남자의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아이고... 불쌍해라! 죽고 싶겠네! 잘 못 걸렸네... 어쩌면 좋니... 미안해요 아저씨..."

 남자는 남편의 감당 못할 분노에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다. 남편에게는 '아이의 생명'이라는 명분이 있었고 그 증거로 새까맣게 비쩍 말라 비실거리는 임산부가 눈앞에 떡하니 앉아 있으니 남자는 뭐라 말도 못 하고 궁지에 몰린 쥐 신세가 될 수밖에...

 명분과 100%의 승률과 금전적 보상이라는 세 박자가 맞아떨어졌으니 남편에게는 정당한 분노를 마음껏 폭발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큰 일을 치르고 돌아간 남자에게서 며칠 뒤 연락이 왔다. 9층에 저당 잡혀 미분양된 집이 하나 있는데 저당을 풀어 줄 테니 그리 이사 가라는 것이다.

 10층 건물의 로열층인 9층은 2층과는 분양가 차이가 꽤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도세만 부담하면 9층으로 이사 갈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다. 9층에 올라가 보니 불을 켜지 않아도 빛은 밝고, 건물의 막힘이 없어 시원하게 환기도 잘되고, 거기다 따뜻하기까지 했다. 우리 재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그런 집으로 이사 가게 된 것은 전화위복이었다.


 나는 감사한 일이고 아이가 복이 많다 말했지만 남편 덕이라 말은 하지는 않았다. 남편이 화풀이 대상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덧으로 힘들어할 때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히려 괴롭혔던 그였다. 배 속 아이에게 더 위협적인 것은 기계 주차장이 아닌 남편이었다. 물론 남편의 수고는 있었지만 때 마침 딱해 보였던 내 몰골과 배 속 아이의 생명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주체할 수 없었던 자신의 분노를 마음껏 폭발시키는 구실로 삼았던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더 좋은 집을 얻게 되었지만 남편은 이후로도 나를 괴롭혔고 나는 임신 중에 큰아이를 데리고 가출을 감행하기도 했었다.


 지금 열두 살이 된 둘째 딸은 아빠와 무척 사이가 좋다.

 아빠가 엄마 속 썩이는 것을 알고 한숨 쉬며 엄마를 걱정하는 딸이지만 나의 일은 나의 일이고 아이에게는 부드럽고 너그럽고 든든한 아빠였으니 둘 사이는 나와 별개로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둘째의 애교에 남편은 말캉말캉 물러터진 순두부가 된다. 그런 남편을 볼 때면 나는 가끔 말에 가시를 담아 순두부를 저격한다.

 "율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러게! 웃을 일이 별로 없었겠지! 복덩이지!"

 "그런 사람이 애가 배 속에 있을 때는 그렇게 못되게 굴었니?"

 "내가 이럴 줄 알았나?"

 "너는 도대체 아는 게 뭐니?"

 "많지~ 내가 아는 게 얼마나 많은데~ 세계사도 많이 알고 인문학도 많이 알아요~ 나 아는 거 많아요~ 다 물어봐!!"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남편의 양 볼때기를 쥐고 흔들어 댄다.

 "어이고~ 말 돌리는 거 봐!! 그런 거 말고 이 인간아~ 내가 너랑 사느라 참 고생이 많다!!! 어?? 콱!! 깨물어 버릴까 보다!!"

 "깨물지 마세요~ 아파요~"

 "앙!!!"

 살살 깨무는 척만 할 뿐 진짜 깨물지는 않는다. 다 알면서 얼굴 근처만 가도 엄살부터 부린다.

 "아야~ 아야~~ 아야~~ 얘들아~ 아빠 살려줘~~ 엄마가 아빠 괴롭힌다~!!"

 "깨물지도 않았는데 엄살 부리는 거 봐!!"

 "아야~ 아야~ 아야~ 아야~ 아빠 살려줘~"

 "이 엄살쟁이야! 앙!!!"

 남편이 살려달라고 외치면 아이들은 '둘이 재밌게 노나 보다!'하고 들은 척도 않는다.

 "아야~ 아야~ 아야~ 아야~"

 "아직 안 깨물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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