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이뻔소
보기 싫은 사람은 보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피할 수 없는 관계라면 참거나 이겨내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남편과의 싸움은 줄었지만 여전히 대화로 풀지 못하는 스트레스와 화가 있었다. 참고 살다 보니 편두통만 더 심해진다. 태평가를 아무리 불러도 속이 너그러워질 리 없다. 부풀어 오르는 풍선에 바람구멍이라도 내줘야 할 텐데...
중학교 때까지 언니에게 맞고 자랐다. 아빠는 육아에 관심이 없었고 엄마는 시시비비를 가려주지 않았다. 어린 내가 찾아낸 화풀이 방법은 욕이었다. 언니가 가르쳐 준 욕이었지만 나는 그 욕을 언니에게 써먹었다. 억울하고 약하고 힘도 없는데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 내가 강해지고 억울함과 분노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욕뿐이었다.
언니와 떨어져 살면서 분노할 일이 없었다. 욕하는 것은 올바른 감정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러나 남편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분노가 극에 다다르자 욕이 입 밖으로 다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남편도 화가 나면 욕을 한다. 하지만 내가 자기에게 하는 욕은 용납하지 못한다. 역시 자기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이다. 싸움의 재판에서 만약 내가 참지 못하고 욕을 하게 되면 남편은 피고의 입장에서 판사로 돌변한다. 자신의 모든 잘못은 덮어두고 욕한 나는 죽을 죄인이라고 재판을 단방에 종결시켜 버린다. 듣지도 않으니 잘잘못은 따질 수도 없다. 욕을 하는 것은 내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욕을 하지 않기로 했고 남편의 욕도 대응하지 않기로 했다.
남편은 어느 부부가 서로 욕하며 싸운다는 말을 듣고 와서는 이해할 수 없다며 흉을 본다. 서로 허용한다면 대화는 가능하겠지... 본인이 용납할 수 없으니 그들의 대화도 이해할 수 없는 거겠지... 서로 욕을 허용하는 것이 이상하다면 본인 입에서 나오는 욕은 괜찮고 내 입에서 나오는 욕은 안된다는 것도 이상해야 옳지 않은가? 자기는 되고 남은 안된다는 이중 잣대를 들이미는 이 남자가 더 이상하다.
욕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으니 순간에 화를 표현하고 분노를 배출시켜 줄 단어가 필요했다. 욕으로 들리지는 않지만 기왕이면 통쾌하게 한방 먹일 수 있는 단어말이다.
어느 날 정치인 비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지랄!"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런데 남편이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지랄이라는 말은 속된 말로 좋은 의미의 단어가 아닌데 남편에게는 친숙한? 단어였던 모양이다. 왜 욕이나 마찬가지인 지랄이라는 말이 나쁘게 들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별스럽지 않게 무시하며 지나가는 말로 "아! 지랄! 지랄!"이라고 가끔 쓰셨던 것이다. 남편에게 '지랄'은 어머니라는 친숙한 대상에게서 듣던 정겨움이 있는 단어였고 그저 뼈가 담긴 말장난이었다.
아는 사람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 지랄하고 있더라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속으로 흠칫 놀랐다. '교양 없이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저런 단어를 서슴없이 쓰지?'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나에게 '지랄'은 그런 단어였다.
그런데 그런 단어에 남편이 반응하지 않는다니... 내 속에서 내 보낼 때는 크게 느껴지는데 듣는 남편은 별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단어. 욕으로 듣지는 않지만 욕처럼 쓸 수 있는 단어.
'옳지! 이거다!'
그래도 말에는 의미가 있으니 최대한 힘을 빼고 배시시 웃으며 가볍게 툭 던져 보았다.
"아! 뭐야~ 지랄하네~"
남편은 내가 잘 쓰지 않던 단어를 쓰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그냥 웃어넘긴다.
오호!! 드디어 바람구멍을 찾은 건가?
이후로 남편에게 '지랄'이라는 단어를 자주 써먹기 시작했다. 절대 욕 같이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이다. 장난스러운 얼굴과 적당한 운율을 더하니 남편은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한동안 마음껏 '지랄'을 외쳐대다 한 개의 단어로는 마음을 다 표현하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찾아낸 단어가 "똥"이다. 문장으로 만드니 "똥 싸고 있네!"가 되었다.
남편은 똥과 친분이 두텁다. 그것을 이용한 유치하고 장난스러운 말처럼 들리겠지만 네 말을 똥으로 여기겠다는 속셈이 숨어있었다. 역시 남편은 "똥 싸고 있네"에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깔깔대며 웃는다. "똥 싸고 있네"도 최대한 자연스럽고, 찰지고, 재미나게 발음해야 했다. 그리고 정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한번 더 참아야 할 때는 "죽는다~"로 마무리했다.
"죽는다"는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 아닌가? 살인을 예고하는 극단적인 단어지만 정말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니 그것도 장난으로 들리는 것이다. 아! "죽는다"는 말은 안전을 위해 기분 좋게 취해 있을 때만 써먹었다. 그래도 거의 매일 취해 있으니 마음껏 써먹을 수 있었다.
한동안 "지랄하네", "똥 싸고 있네", "죽는다"를 장전하고 따발총을 난사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속이 시원했다. 어쨌거나 내 묵은 화는 풀리는 것 같았다.
통쾌하고 시원한 여러 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큰아이 입에서 "지랄하네", "똥 싸고 있네", "죽는다"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차! 싶었다. 아무리 내가 장난인척 쓰는 말이라지만 아이의 입으로 듣는 말의 느낌은 또 달랐다. 아이가 쓰기 적절치 않은 말은 부부의 말로도 적절치 않은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쓰면 아이들도 쓴다. 둘째 아이는 눈치가 빨라 엄마 말을 따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내가 아무렇지 않게 계속 쓴다면 둘째 아이도 언젠가는 쓰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실천하기 바란다면 내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철칙인데 복수에 눈이 멀어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리석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사과했다. 엄마가 잘못했다고... 아빠에게 화가 나서 썼던 말인데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다시는 그런 말을 쓰지 않을 테니 너희들도 쓰지 말라고...
그렇다면 기분 나쁘지 않은 욕은 없을까? 없다고 본다. 욕은 욕이다. 아무리 상대가 당장 기분 나쁘지 않더라도 말의 의도가 욕이었다면 그것은 욕이 되는 것이다. 또한 서로 욕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인상을 찌푸릴 수도 있다.
(이런! 시베리아, 이런! 수박씨 발라 먹을 , 이런! 십장생...) 같은 말들도 실제 욕은 아니지만 욕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낼 말장난 아닌가? 신박함에 잠시 정신을 빼앗겨 재미있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욕은 욕이다.
화를 내지 않는다면 더 좋겠지만 세상에 모든 화를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어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 것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감정을 조심스럽게 절제하며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화를 말로 표현하지 않기로 했다. 적당히 짜증 났을 때는 장난스럽게 돌려서 말 하지만 속된 말은 섞지 않기로 했다. 정말 화났을 때는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문을 쾅 소리 나게 닫는다거나, 설거지하면서 그릇을 신경질적으로 다루는 등의 짜증 가득한 행동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반나절이 지나도 남편은 내가 화났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래도 침묵하고 기다리다 보면 남편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말을 해야 할 때조차 말하지 않거나, 오고 가는데 인사를 하지 않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그제서 화가 났음을 확실하게 인지한다. 물론 왜 화가 났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내 입을 통하지 않고도 '내가 뭘 잘못했나?'라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답답하고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오히려 효과적이다. 나쁜 말은 한방에 쉽게 전달되지만 상대가 받아들이고, 뉘우치고, 고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화풀이만 될 뿐이다.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남편은 이제 내가 화가 나 말을 하지 않으면 무섭다고 한다. 크고 시끄러운 단어를 써야 화가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당장 화를 참는 일은 힘들지만 자리를 벗어나 조용히 입을 다물고 다른 일을 하다 보면 불같이 끊어 오르던 분노도 서서히 진정되고 냉정함을 되찾게 된다. 일단 말실수로 인해 화를 자처하는 일은 모면할 수 있다.
속이 시끄럽지 않으니 마음 다스리는 것도 쉬워진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서서히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너그러워지거나 남편의 행동이 이해가 될 때도 있다. 적절한 침묵은 여러 가지로 이로울 때가 많다.
충분한 시간을 가진 후에 왜 화가 났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조용하고 간결하게 이야기하면 훨씬 수월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남편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욕하는 법이 뭐야?"라고 굳이 묻는다면 '침묵'이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