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이뻔소
남편과 싸우며 생긴 오래된 상처를 꺼내 놓고 이야기했다. 남편은 언제 적 일을 아직도 담고 있냐고 말하지만 서러웠던 기억, 상처로 남아 마음을 얼게 만들었던 기억들은 없어지지 않는 걸 난들 어쩌겠는가? 더군다나 사과도 받지 못했으니 아직까지 담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남편도 예전에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었고 잘못됐다는 것들을 안다. 작은 실수는 금세 미안하다 말해도 정작 큰 잘못은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사과를 받아 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몇 년 전 일에 대한 사과를 결국 받아냈다. 그리고 아이처럼 두 팔을 벌려 남편에게 안겼다.
사람은 15분 동안 안고 있으면 모든 속상한 마음이 녹는다는 말이 있다. 서로 안고 체온을 나누면 많은 것들이 용서되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남편에게 안아달라고 하면 채 1분을 견디지를 못한다. 그러면 나는 더 오래 안겨 있으려고 코알라처럼 매달려 장난을 친다.
마지막으로 남편이 넘어야 할 관문은 칭찬 대잔치다.
"안아 주는 걸로 부족해! 이제 내 칭찬 100개만 해봐!"
"뭐? 100개? 칭찬을 100개나 하라고?"
"그럼? 잘못한 게 많으니까 칭찬도 많이 해줘야지~ 그리고! 내가 칭찬받을 게 100개도 안된다고 생각해?"
"에이~ 아니지~ 우리 자기는 칭찬거리가 넘치지!"
"그래~ 그러니까 100개만 해 보라고! 나 칭찬에 엄청 약한 여자야~"
"아이고! 그러시구나~ 몰랐네?"
"가르쳐 줬으니까! 얼른얼른해 봐!!"
"어... 일단! 자기는 요리를 잘하고! 깔끔하고! 애들을 잘 키워!"
"아니야~ 자기가 좋아하는 거 말고 내가 좋아하는 거!"
"그런 거 말고? 그럼 뭐가 있지? 그럼 어려운데?"
"잘 생각해 봐~ 어렵지 않아~"
"음... 음.... 음.... 씁! 자기는 보통 사람이랑 좀 차원이 다른 사람인 것 같아! 결이 고은 사람이야!"
"그렇지! 그런 거! 아이고~ 잘하네~ 이제 아흔아홉 개 남았어요!"
"음... 인내심도 대단하고, 희생정신도 어마어마하고, 남을 위할 줄 아는 거 같아!"
나는 손가락을 접어 개수를 세면서 만족의 표시로 눈은 찡긋 감고 고개도 끄덕였다.
"어! 또 해봐!"
"그리고... 어... 공감도 잘하고, 사랑이 많지! 음... 아! 신실하지!"
"그래~ 잘하고 있어! 또!"
"음... 또 뭐 있지? 뭐 있더라?"
"잘 생각해 봐~"
"어렵네... 또... 뭐 있더라? 어!! 섬세하고... 요즘엔 말도 예쁘게 잘하고!"
"응! 또!"
"또... 뭐 있지? 많이 했는데? 그만하면 안 될까? 더 이상 생각 안 나는데?"
"야!! 겨우 아홉 개 밖에 안 했거든?"
"에이 몰라~ 그만하자~~ 아홉 개면 많이 했네!"
"안돼!! 어림도 없어!! 나는 칭찬 100개가 필요해!!"
"생각 안 난다고요~"
"나는 아직 다 안 풀렸거든요? 일루 와 봐! 그럼 대신에 한 번만 물어뜯자!"
남편은 익숙한 듯 내 양 손목을 꽉 붙들고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멀리 밀어붙이며 낄낄거린다.
"크크크 어디 한번 물어보시지??"
"이거 안 놔? 야!!!! 손목 아프다고!! 에이 씨! 진짜!! 이거 안 놔?? 노라고!!"
그렇게 내 오래된 서운함은 사과와 포옹과 칭찬으로 사르르 녹았다.
남편이 내게 서운 했던 것들을 풀어 주려면 남편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 최고다. 남편도 칭찬을 좋아하지만 남편에게 해주는 칭찬은 유통기한이 짧다. 칭찬보다 더 오래가고 효과적인 것은 돈이다. 마음이 흡족할 정도의 거금 말이다. 나도 돈을 받으면 좋지만 단지 기분이 좋다고 해서 서운함이 녹지는 않는다. 내게는 오히려 칭찬이 더 효과적이다.
남편의 용돈은 많지 않다. 생일이라고 100만 원을 봉투에 담아 주니 입이 귀에 걸렸다. 사실 남편과 내 생일은 양력을 쓰면서 같은 날이 되었다. 남편의 생일은 내 생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주고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남편의 주머니 사정을 뻔히 알면서 뭘 사달라 말할 수는 없었다. 가끔 비상금의 존재를 알게 되면 그때는 대놓고 사달라고 하기도 했다.
카톡으로 "나 이거 사줘!! 사 줄 수 있어요?"하고 반짝거리고 블링블링한 것의 사진과 함께 링크를 보냈다. 그러면 남편도 주저 없이 사줬다. 가끔. 아주 가끔 말이다. 그래봤자 20만 원을 넘지는 않는다.
남편이 자전거로 운동을 시작한 지 5년 정도 됐다. 처음에는 아이들과 같이 타라고 40만 원짜리 자전거를 사 줬다. 40만 원짜리 자전거에 감탄하던 남편은 자전거 유튜버 채널을 구독하고 점점 자전거의 세계로 빠져들더니 40만 원짜리 자전거가 성에 차지 않는 눈치였다.
남편은 아파트에서 같이 담배를 피우며 인사를 하고 지내던 위층 남자가 자전거를 탄다는 것을 알게 된 모양이다. 그 남자와 얼굴만 마주치면 자전거 이야기로 서로 즐겁다. 그 남자는 자전거 세계가 개미지옥이라고 말했다. 이걸 사면 저것도 사게 되고 점점 더 비싼 것을 사게 된다고... 그러다 보면 부담스러워 당근마켓에서 중고로도 사게 된다고... 그러면서 은근히 자기 자전거 자랑을 한다. 남자는 300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뭐는 어떻고, 뭐가 필요하고, 뭐가 좋다는 이야기를 꺼내 놓으며 한 없이 자랑질이다. 둘은 매번 한번 같이 타러 가자고 마무리 인사를 하며 올라온다. 하지만 서로 같이 탈 마음은 없다. 연락처도 모르고 구체적인 약속도 잡지 않는다. 인사치레일 뿐이다.
남편은 위층 남자를 만나고 오면 쪼르르 달려가 책상 앞에 앉아 폭풍 검색을 하고는 나를 부른다. 이거는 어떻고 저거는 어떻고 자전거는 뭐가 좋다며 신이 나서 이야기한다. 결론은 자기도 갖고 싶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거 사달라고?"
"에이~ 아니지~~ 그냥 갖고 싶다고~~"
비싼 가격에 차마 사달라고는 못하고 말을 흐린다.
나는 위층 남자의 자장질이 점점 불편해졌다. 위층 남자가 자랑할수록 남편의 부러움은 커져만 갔고 더불어 자신의 초라함이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전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값비싼 자전거를 사 줄 마음을 먹고 말았다.
'에이 씨! 사!! 사면되지! 위층 남자도 사는데 너라고 못 사겠니? 짜식이 어디 남의 남편 기를 죽이고 있어?'
곧장 매장으로 가 300만 원짜리 자전거를 일시불로 사 버렸다. 안장을 업그레이드하고 액세서리까지 추가하니 360만 원이다. 외제차도 부럽지 않고 명품가방을 앞에서 흔들고 다녀도 부러워하지 않는 나인데 남편의 자존심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놈에 위층 남자만 아니었어도 360만 원을 한방에 지를 일은 없었을 텐데...
생활비도 아닌 내 개인 돈으로 360만 원을 한방에 긁는 것을 보고 남편은 내가 자기를 엄청 사랑하는 것을 그제서 깨달았다며 웃는다. 뭐지? 그동안에는 몰랐는데 목돈을 쓰니까 그제서 알았다고? 이 남자 둔해도 너무 둔하다.
360만 원짜리 자전거를 사 준지 3년 정도 지나자 남편은 700만 원짜리 자전거에 보기 시작했다.
"자전거 또 사려고?"
"이거 봐! 할인하나 봐~"
"얼만데?"
"700만 원짜린데 640만 원에 올라왔어! 왜 이렇게 싸게 올려놨지?"
"그게 싼 거야?"
"그럼~ 원래 700만 원 짜리잖아!"
"어이구! 그게 어딜 봐서 700만 원짜리야?"
"1000만 원짜리도 있고, 2000만 원짜리도 있어."
"제정신이니? 자전거 2000만 원짜리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
"어! 가끔 있어. 나도 직접 봤어!"
"헐~~"
"여기 봐봐!! 몸체가 달라! 경량 메탈 일체형 바디야! 이음새가 하나도 없이 통으로 되어 있어! 그리고 기능이 엄청 많아. 이거 봐봐! 캬~~~ 멋지지 않니??"
눈은 반짝거리고 얼굴에 환하게 달이 뜬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흐리멍덩한 동태 눈깔을 한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니!! 하나도 안 멋진데? 어디가 멋지다는 거야?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다 똑같이 생겼는데?"
"아니야~ 이거 날렵하고 진짜 멋있는 거야! 자기가 잘 몰라서 그래!! 잘~ 봐봐!! 어라? 가격이 다시 올라갔네? 에이... 실수로 잘못 올렸나 보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싸게 팔 리가 없지!"
"그래... 700만 원! 자기가 돈 모아서 사면 되겠네! 나는 취미용 자전거를 700만 원짜리 사줄 만큼 넉넉하지 않아요~ 그것도 내!! 자전거도 아니고 네!! 자전거를 말이지??"
"어...... 알았어... 그래야지......"
"분명히 나는 안 사준다고 말했다~"
"알았어! 내가 돈 모아서 살 게..."
"당장 사지도 못할 거면서 뭐 하려고 자꾸 보는 거야?"
"그냥 좋아서 보는 거야~"
"어휴~ 그래! 눈요기라도 많이 하세요!"
360만 원의 효과는 한 1년 정도 갔나 보다. 라이딩을 다녀오면 어느 아저씨가 자기 자전거를 유심히 보더라고 기분이 좋아서 자랑을 한참 하더니... 이제는 700만 원짜리에 꽂혀서 360만 원짜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시들해졌고, 내가 자기에게 거금을 썼다는 것도 잊은 지 오래다.
대학 동기 놈이 빠듯한 살림에 500만 원짜리 자전거를 샀다고 자랑질이다. 남편이 자전거를 탄다는 소리를 듣고 같이 타자고 친한 척이다. 동기 놈과 남편이 친해지면 동창회 가는 것이 쉬워지려나? 싶어서 친구 이야기를 몇 번 하긴 했지만 친구 놈도 단톡방에 매일 자전거 자랑질이다. 같이 타면 안 될 것 같다. 위층 남자보다 더하다. 내가 놈이라고 부르는 그 친구와 나는 마치 남자 vs 남자? 같은 사이라 남편과 은근히 친해지기를 바랐지만 자전거 때문에 망했다.
누구와 타든 타지 않든 어쨌거나 나는 여유가 생기면 남편의 자존심과 기를 살려주기 위해 또 저놈에 비싼 자전거를 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위층 남자의 자랑질 덕분에 남편의 마음을 녹이는 방법은 칭찬보다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끼고 아껴서 모은 내 피 같은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뭔가 많이 손해 보는 느낌이다.
돈 안 들이고 칭찬 100개. 얼마나 좋아?? 칭찬거리가 몇 개 없는 너라도 나는 진정성 있는 칭찬과 나머지 소소한 것들로 100개를 꽉꽉 채워줄 자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