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이뻔소
남편은 한국 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는다. 미드, 전쟁영화, SF영화 같이 액션이 크고 파격적인 것 위주로 본다. 나는 잔잔하고 감성적인 로맨스 드라마를 좋아하고 웅장함 보다는 스토리와 섬세한 표현에 집중한다.
서로 다른 취향의 우리가 어쩌다 같이 보게 된 드라마가 있었는데 2016년 이은숙 작가의 "태양에 후예"다. 나의 추천으로 남편도 보기 시작했지만 남편이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본 이유는 소소한 액션과 브로맨스를 보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새로움을 선사한 드라마였지만 충격적이었던 것은 남녀 주인공의 미워할 수 없는 농담 같은 거짓말들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대사들이다.
-유시진의 대사 중에서-
작전을 가면서... 안 죽을 게요.
강모연을 놀리며... 방금 지뢰 밟았어요.
다른 여자에게서 택배가 온 것을 알고 뛰어와서는... 오해입니다. 오해가 확실합니다.
여자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고 변명하면서... 그거 웃은 거 아닙니다. 웃은 것처럼 보일 테지만 웃기게 생긴 겁니다.
가기 싫은 상황에서 서상사에게... 나 맹장인 것 같습니다.
이전의 자신의 행동이 불리해지면... 그거 저 아닙니다.
-강모연의 대사 중에서-
유시진이 돌아와 캠핑할 때... 그거 저 아니에요. 그 여자는 한 살 어렸죠. 저보다 뭘 잘 몰라요.
핸드폰의 고백을 듣고 따라온 유시진에게... 그거 고백 아니에요. 이거 핸드폰 아니에요.
손목을 잡은 유시진에게... 대답할 테니까 이거 놓고 이야기해요. 쌩~
도망 다니다 딱 걸려 하는 변명... 그거 유언 아니에요. 그건 나 아니고요.
작전 간다더니 엉뚱한 짓 하는 화면을 보고... 저거 유대위 아니에요. 빠작!
그중 충격적으로 다가온 대사는 "그거 저 아닙니다."였다. 사기꾼도 울고 갈만한 거짓말이다. 그런데 능청스럽고 코믹하기까지 하니 같이 웃다 보면 미워할 수도 없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유시진의 거짓말을 받아들이는 강모연의 태도였다. 물론 한 작가가 썼으니 혼자 북 치고 장구도 치고 두 남녀의 장단은 잘 맞을 수밖에 없다지만 아무튼...
이 대목에서 이제 남편의 거짓말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남편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 매끄럽지 못한 거짓말에 기술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티도 팍팍 난다.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남발하고는 뒷수습도 못한다. 궁지에 몰리니 일단 지르고 보지만 바보같이 매번 같은 거짓말을 해대니 바로 걸리고 만다.
저녁 7시에 퇴근해 집에서 밥을 먹겠다던 남편은 밥 해 놓고 기다리는데 8시가 넘도록 소식이 없다. 전화를 하니 당당하게 밥 먹고 9시에 출발하겠다고 이야기한다. 9시 반인데 또 소식이 없다. 또 전화를 하니 "어! 지금 가네!"라고 말한다. 밥 만 먹고 온다는 사람이 이번엔 술이다.
남편이 말하는 '지금'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금'과 다르다. 사람들의 '지금'은 '말하는 바로 이때'를 의미한다. 그러나 남편의 '지금'은 '머지않아'라는 애매한 시간개념으로 한 시간 뒤가 될 수도 있고 두 시간 뒤가 될 수도 있다. 자기가 출발할 준비가 됐을 때가 '지금'인 것이다. 술이 들어가면 시간의 개념은 없어지고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계속 지금인 것처럼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남편은 10시에 전화해도 "어! 지금 가네!", 또 11시에 전화해도 "어! 지금 가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12시가 넘을 때는 어딘가에서 잠들어 전화도 받지 않는다. 계속 전화하는 게 지겨워 전화를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남편이 계속 전화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화하지 않으면 자기는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고... 그나마 전화를 하니 조금 빨리 들어오는 걸 거라고... 하지만 계속된 거짓말을 듣는 것이 지겹고 화가 난다.
누구나 술을 마시면 마신 티가 난다. 말투는 어눌해지고 말의 속도는 느려진다. 남편은 술 마셨을 때만 쓰는 말투도 있다. 종이에 패턴을 찍어내듯 같은 말을 찍어낸다. 자세한 설명도 없이 "어! 지금 가네!"를 무한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질문에는 엉뚱한 대답만 하고, 안 취했으니 구구단을 외워보겠다고 한다. 그리고 "나! 술 안 마셨어!"라고 우기기도 한다. 술 냄새가 폴폴 나도 안 마셨다고 우긴다. 자꾸 우기길래 음주 측정기를 샀다. 그랬더니 이제는 음주 측정기가 불량이라고 우긴다. 뻔뻔스럽기가 하늘을 찌르니 보고 있으면 기가 찬다. 어떨 때는 이 인간의 뇌 구조가 퍽 궁금해질 때도 있다.
대리 운전기사가 옆에서 버젓이 듣고 있어도 술 안 마셨고 본인이 운전 중이라고 조금의 부끄럼도 없이 거짓말을 할 때면 내가 더 부끄러워진다.
얼마나 마셨냐고 물으면 무조건 소주 한 병이라고 말한다. 아침에 물어보면 약간의 정직함과 기억력이 더해져 한병 반이나 두 병 정도로 늘어난다. 당시에는 한병 이후의 기억이 없으니 한 병이라고 하는 건지... 귀찮아서 또는 잔소리 듣기 싫어서 한 병이라고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무조건 한 병이다. 나를 바보로 만드는 대답을 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매번 물어본다.
자는 것을 깨우면 "나 안 잤어!"라고 말하고, 코를 골아서 시끄럽다고 깨우면 "나 안 잤는데?!"라고 말한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허구한 날 잠만 자는 꼴이 보기 싫다고 하니 무조건 반사처럼 튀어나오는 거짓말 인가?
하지만 그가 자꾸 잊어버리는 한 가지는 나는 거짓말을 더 싫어한다는 것이다. 나는 선의의 거짓말도 되도록 하지 않는다. 부득이한 경우라도 거짓말보다는 상처받지 않게 돌려서 말하거나 차라리 솔직하게 조곤조곤 설명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니 남편의 계속되는 거짓말에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화가 나고, 거짓말을 남발해서 또 화가 나고, 금세 들통날 얄팍한 거짓말을 자꾸 겹겹이 싸니 또 화가 난다. 이런 남편의 거짓말들은 싸움을 부른다.
이제 다시 "태양에 후예"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드라마는 드라마 일 뿐 현실과는 다르다. 김민수는 유시진이 될 수 없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남자는 유시진의 어느 한구석도 닮지 않았다. 유시진의 빛나는 멜로 눈동자와 김민수의 동태 눈깔을 비교하다 보면 짜증이 치밀어 오를 수도 있다. 나도 뭐 강모연이 될 수는 없으니 피차 마찬가지다. 외모 비교는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유시진의 거짓말에는 기술과 재미가 있지만 남편의 거짓말에는 기술도 재미도 없고 화만 부른다.
남편은 접어 두고 그럼 나는 어떤가? 외모는 강모연이 될 수 없지만 생각의 틀은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은가? 유시진의 거짓말을 대하는 강모연의 태도가 내 머리를 심하게 방망이질했으니 그동안 진리로 여겨왔던 나의 생각의 틀을 깨 보기로 했다.
거짓말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그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가? (어느 스님이 했던 말 같기도 하고... 글을 다 쓰고 검색해 보니 최근에는 싱어게인 참가자가 말했다고 나오기도 하는데... 그럼 내가 원조인가?^^) 들어본 적 없는 말이라 치고 이 대목에서 충격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연륜이 있거나 이미 고수인 것이 확실하다.
당시 "태양의 후예"에 홀딱 빠져있던 내게 유시진과 강모연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거기에 남편과 같은 드라마를 보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우린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 말랑말랑 해지기도 했다. 내가 설레었던 것에 너도 설레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많은 벽이 허물어졌고 거짓말의 기술에 대한 둘만의 유머 포인트가 생기면서 드라마 대사를 주고받으며 낄낄 거릴 수 있었다.
덕분에 생각은 좀 더 유연해질 수 있었고 남편의 거짓말을 조금씩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싫어"가 정말 싫다는 표현이 아니듯 남편의 "지금"도 꼭 문자 그대로의 지금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태도가 달라지니 화가 줄었다. 남편의 거짓말도 조금씩 줄었다. 궁지로 몰지 않으니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거짓말도 밉지 않게 말하는 기술이 필요하듯 어설픈 거짓말도 이해하고 넘어가 주는 기술이 필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