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상한 목공방 2]
집으로 가는 길. 지하를 달리던 전철이 지상으로 나올 때면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도쿄의 하늘은 한국의 가을 하늘보다도 맑고 푸르다. 시가지를 빠져나오면 나지막한 주택가와 논밭이 펼쳐진다. 한국의 시골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도착을 알리는 방송 소리만 요란할 뿐 전철 안은 한산하고 조용하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데 나만 바쁘고, 나만 힘들고, 나만 치열하다. 나는 외톨이 이방인이다.
가끔은 신도림역에서 부평행 급행을 탄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대로 문이 열리면 한국 땅이었으면...
종일 서서 일을 해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밤 11시 2분 막차를 타고 집으로 올 때면 피곤에 지친 몸은 지탱하기도 버겁다. 집으로 가는 길은 전철로 20분 걸어서 또 20분이다.
동네로 들어서면 어두운 길을 걸어야 했다. 큰길로 돌아서 가느니 캄캄한 지름길을 선택했다. 편의점에서 230엔 하는 맛 좋은 기린맥주 대신 저렴한 130엔 발포주 한 캔과 조그마한 치즈스틱 한 조각을 담은 봉지를 흔들며 집으로 향했다. 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기대감과 어두운 골목의 두려움이 엎치락뒤치락 씨름을 하는 동안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집 앞이다. 침침하고 어둡고 비좁은 다섯 평짜리 원룸. 이곳이 내가 살고 있는 집이다.
벽에 기대어 맥주를 홀짝거리며 어제 보다가 잠들어 다 보지 못한 한국 드라마를 틀었다. 유일한 행복이자 사치스러운 시간이었다.
일본으로 건너와 처음 어학연수를 받을 때는 도쿄 시내에 있는 기숙사 생활을 했다. 기숙사는 학원에서 제공하는 숙소가 아니다. 저렴하고 열악한 유료 시설로 유학생들을 타깃으로 지어진 곳이다. 5층 건물 안에는 쪽방들이 다닥다닥 줄지어 붙어있다. 그중 2층 끝방이 내 방이다. 잠자는 작은 방 이외에 모든 시설은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어있다. 한국의 고시원과 닮았다. 남편의 도움으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작고 답답한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엔화와 원화의 환율 차이는 열 배에 달했다. 남편이 보내주는 돈으로는 기숙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최소한의 회화라도 가능해야 했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밖에 모르던 나는 어학원만 믿고 용감하게 비행기를 탔다. 무모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절박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해 두자.
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중국인이었다. 그들보다 3개월 늦게 들어온 주제에 나는 겁도 없이 레벨을 한 단계 올라달라는 요청을 했다. 뒤처진 3개월을 만회하고 싶었다. 일본 드라마와 만화를 시청하면서 벽에 대고 대사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공부를 하고 허구한 날 벽에 대고 떠들어 댄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인 수강생들보다 앞선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8개월 만에 편의점 주말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보수는 적지만 손님과의 접촉이 적고 대단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아도 일을 할 수 있었다. 가끔 말 걸어오는 손님들은 오히려 부담 없이 일본어를 익힐 수 있는 실습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는 한인타운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한국 유학생들은 고향이 그리워 한인타운을 자주 찾는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나를 외로움에 가둬 두었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빨리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아침 8시부터 시작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근처 소바집 할아버지도 그렇다.
손님이 들어오면 눈을 맞추고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소바집 할아버지는 뭐가 그리 고마운지 입구에 선채로 허리 숙여 답례를 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는 항상 작고 귀여운 군것질 거리를 들고 왔다. 녹차맛 초콜릿 미니팩과 소포장된 롤케이크와 190ml 도라에몽 딸기맛 우유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다. 어린아이 같이 단 것만 골라 오는 할아버지가 귀여워 웃음이 났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은 참느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할아버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날씨가 추워요. 감기 조심해요!"
고립된 생활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던 나에게 할아버지의 한마디는 따뜻한 온기로 전해졌다. 할아버지도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일본의 젊은 아르바이트생들과 달리 친절하고 따뜻하게 응대를 하는 나를 소바집 할아버지는 무척이나 예뻐했다. 더듬더듬 말도 잘 못하는 한국인 아르바이트생을 위해 쉽고 짧은 문장으로 천천히 말을 해 주었다. 소바집 할아버지와의 소소한 대화들 덕분에 실용 일본어를 더 빨리 익힐 수 있었다.
학원을 졸업할 시기가 되자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여전히 일본 생활은 어려웠지만 잘 적응하고 있었으니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소개받은 여러 개의 대학교 중 유일하게 목공소가 있는 학교가 하나 있었다. 왜 목공소가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목공소가 있는 학교를 선택했다. 2년 과정의 전문대학으로 시각디자인 전공이었다. 대단하거나 유명한 학교는 아니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상황이 그런 것을.
대학 수업이 끝나는 오후 4시부터 밤 10시 30분까지 유니클로 도쿄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평일 오후에는 유니클로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는 종일 편의점에서 일을 했다. 유니클로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 많아 편의점 보다 훨씬 힘들었다. 요구사항도 많았다. 점장은 이어폰에 대고 "오늘은 표정이 왜 굳어 있어? 웃어야지! 손님들 앞에서는 무조건 친절하게 웃어야 돼!"라는 말을 반복했다. 매장은 전철역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퇴근시간이 되면 매장 밖으로 나가 "오늘은 유니클로 여성 히트테크가 20% 세일입니다~"라고 외쳐야 했다.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 봤지만 호객행위는 처음이었다. 한국에서도 피했던 일을 일본까지 와서 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맡겨진 일을 마다하지 않고 뭐든 극복하고 이겨내려 애썼다. 시간이 지나자 호객 행위도 익숙해졌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이사 갈 집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도쿄에서 조금 떨어진 사이타마현 시키역 근처에 방을 얻었다. 시키역은 도쿄 유라쿠초역에서 이케부쿠로 방면 쾌속 전철로 20분 거리다. 시키역에서 집까지는 또 20분을 걸어야 한다. 한국으로 따지면 경기도에서 서울로 통학하는 정도로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2층 건물을 아파트라고 부른다. 새로 이사 간 집은 2층 아파트 다섯 평짜리 원룸이었다. 두 평도 안 되는 기숙사보다야 나은 것은 당연하지만 저렴한 곳을 찾아 멀리 나와야 했던 형편에 좋은 집이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오래된 목조주택. 일본 호러영화에 등장하던 칙칙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내부. 석고벽에 페인트칠만 대충 해 방을 나눠놓았던 기숙사와 마찬가지로 방음에 취약했다. 휴대폰 진동소리가 복도에서도 들릴 정도였으니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는 이어폰을 꽂아야 했다.
침대는 공중에 설치되어 있었다. 복층 구조라고 했지만 절대 복층 구조는 아니다. 침대 놓을 자리가 없어 공중에 설치한 것뿐이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부실한 나무 사다리를 앞으로 내려오다 고꾸라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변기에 앉아 샤워를 해야 하는 협소한 화장실과 작은 베란다와 부엌을 포함해 모두 다섯 평인 아주 작은 원룸이었다. 한국에서의 대학시절 자취방 보다도 열악했다. 그릴이 하나밖에 없는 싱크대에는 도마를 놓을 자리도 요리할 공간도 없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들만 갖추고 살았다. 작은 전기밥솥 하나, 냄비 하나, 소형 도마와 작은 과도 하나, 밥그릇 하나, 컵 하나, 수저 한 벌이 부엌살림의 전부였다. 1인용 작은 상은 책상이요 밥상이었다. 가구도 하나 없었고, 두꺼운 겨울 이불 한 채로 사계절을 보냈다. 한국에서 들고 온 노트북이 가장 고가의 물건이었다.
기숙사에 있을 때는 근처 식당에서 우동과 돈카츠를 먹기도 했지만 일식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자주 굶기도 했다. 서른 넘은 나이에 영양실조로 얼굴에는 허연 마른버짐이 피었다.
석 달에 한 번씩 남편이 보내준 택배가 집으로 도착했다. 택배 안에는 어머니표 김치와 과자가 가득했다. 김과 즉석 짜장도 몇 개씩 들어 있었다.
처음 사귈 때나 결혼을 할 때도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남자였다. 그저 이 정도면 속은 썩이지는 않겠거니 생각하고 별 기대 없었던 남자인데. 꼼꼼하게 싸서 보내주는 택배를 받을 때마다 이 남자에게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택배가 온 날이면 보내준 즉석 짜장을 데워 밥 위에 뿌리고 잘 익은 김치를 손으로 찢어 얹어 게걸스럽게 먹었다. 꿀맛이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탕을 먹고 나면 당수치가 치솟았다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한동안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식사 때마다 김치요리를 해 먹었다.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김치 오므라이스. 그마저도 귀찮을 때는 그냥 밥을 김에 싸서 김치와 먹기도 했다.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아껴야 했다. 마른버짐은 없어지지 않았고 감기도 자주 걸렸지만 병원 한 번 간 일이 없었다. 튼튼하게 타고난 몸뚱이가 그때만큼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일 년에 두 번 남편은 일본으로 휴가를 왔다.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남편을 기다릴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만 보여도 뛰어가 안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언제부터 내가 남편을 이렇게 좋아했던가? 언제부터 그가 내게 이토록 소중한 사람이었던가?
한국에서는 회사를 그만두고 얼마간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종일 잠만 자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남편은 어학원을 알아보고 유학 준비를 도와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남편의 고마움을 몰랐다.
일본에서 마주한 남편은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었다. 남편도 그랬다. 우리는 서로가 애틋했다. 남편이 나를 반갑게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지아는 참 대단한 여자야!"
남편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의 품은 한없이 따뜻하고 넓었다. 일본까지 찾아와 주어서 고마웠고, 나와 같은 마음이어서 고마웠고, 무엇보다 보물 가득한 택배를 보내준 장본인이라서 더욱 고마웠다.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면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허전하고 섭섭했다. 그럴 때면 화상채팅으로 얼굴을 보며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일본으로 건너온 지 삼 년이 지났다. 이제 제법 적응을 했다. 교수와 한국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일본 친구들에게 머리에 우동사리만 찼냐는 욕도 날릴 줄 알게 되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막힘 없이 소통할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늘었다.
하지만 생활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니클로는 닷새 중 이틀을 쉬게 되었지만 그 이틀 동안에는 늘어난 학교 과제를 해야만 했다. 쉬는 날은 없는 셈이었다. 3년을 부지런히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쳇바퀴 돌듯 제자리걸음이었다. 나는 일본에 왜 온 것일까?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온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여기서 배운 것들은 과연 나에게 도움이 되기는 하는 걸까? 이렇게 살려고 일본까지 온 것은 아닌데...
영양실조는 여전했고, 다섯 평 방구석의 초라한 살림과 궁상도 여전했다. 지겨웠다. 매일 레벨 업하며 업그레이드되어 파이팅 넘쳤던 날들을 보냈지만 3년이 지난 지금 일본어를 할 줄 알게 된 것 말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돌아갈 것인지 남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취업자리를 알아보았다. 중국인을 고용하려는 곳은 있어도 한국인을 고용하려는 곳은 드물었다. 겨우 취업한다 한 듯 잘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다음 취업도 난관이 될 것은 뻔했다. 돌아가기로 했다. 배고픈 이방인의 생활을 미련 없이 끝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한국으로 돌아왔지."
회상하듯 주절주절 떠드는 말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돌아와서 바로 목공방을 차린 거야?"
"아니! 이래 저래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건축회사에 들어갔는데. 또 무기력증이 와서 결국 관두고 목공방을 차린 거지."
"그래? 그러면 일본에서 배운 것들은 어쩌고?"
"나는 일본에서 배운 게 별로 없나 봐! 아!! 웬만한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는 인내심과 끈기를 배웠나?"
"뭐? 그렇게 고생을 하고 왔는데 배운 게 없어?"
"농담이야~ 배운 게 왜 없겠냐. 디자인하고 목공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겠지! 아무튼 나는 일본에서 힘들게 살다 와서 그런지 이제는 웬만한 일로는 어렵다는 생각도 안 들어."
"그래... 이야기 들으면서 나도 느낀 바가 크다."
"그래? 뭘 느꼈는데?"
"뭐! 여러 가지로..."
베드로는 진지했다.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고는 자신의 속 마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배부른 투정을 하면서 살고 있었네! 모든 걸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었던 거지.
감사한 줄도 모르고 불평불만만 가득했지.
직장도 상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려치우고, 힘들게 들어간 회사도 조금만 힘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려치웠지. 분명히 다시 취직할 수 있었는데... 백수로 지내면서 방구석에 처박혀서 게임만 했어.
그래놓고는 또 살기 싫다고 투정 부리고 남 탓만 하는 멍청이였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네?
너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렇게 꿋꿋하게 살고 있었는데...
나는 뭐냐? 부모님 사랑 넘치도록 받고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서 내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사회생활을 해보니 호락호락한 일이 어디 있나? 만만 한 건 하나도 없고 남이 뭐라 하는 건 듣기 싫었던 거지.
이야기 들으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더라. 내가 정말 노력이라는 걸 하면서 살았나? 죽도록 노력해 본 적은 있었나? 생각해 보니까 없더라고. 고3 때도 머리 좋은 거 하니 믿고 탱자탱자 놀러 다녔던 놈이거든 내가.
결국 자기 하고 싶은 일.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아야 만족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더 노력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맙고, 네 이야기 들려준 것도 고맙다. 이야기 듣는 내내 내 속에서는 거대한 폭풍이 이는 것 같았어. 하하!"
"그래 다행이다. 아까보다 네 표정이 훨씬 좋아 보인다! 오늘 내가 사람 하나 살린 건가?"
"그런가? 하하하! 확실히 의욕은 살아난 것 같다."
"잘 좀 살아라! 뭐! 그렇다고 뼈를 갈아 넣으면서 살지는 말고. 적당히 열심히 즐겁게 살아."
"그래!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짜식! 말귀도 참 잘 알아들어! 그렇게 머리 좋은 놈이. 어? 그러고 살았니?
나는 원래 내 과거 이야기 하는 것 좋아하지 않아. 뭐 좋은 이야기라고 구구절절 떠들겠냐?
담담하게 말은 해도 아픈 이야기가 많으니까 우울해져서 말하기 싫어.
그래도 오늘은 특별히 너를 위해서 마음과 정성과 오랜 시간을 투자했네!"
"나도 이렇게 남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 본 적은 처음이야."
"사람 사는 건 다 힘들어.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니? 그러니까 힘들다고 좌절하고 구석에 처박히지 말고 너의 길을 잘 찾아봐!"
"야~~~ 지아가 언제부터 이렇게 어른스러웠나? 오늘 무지하게 고마운데. 내가 저녁 살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으로는 가라는 시늉을 했다.
"친구야! 이제 그만 가!! 남편 올 시간 다 됐어. 밖이 깜깜해."
그러고는 일어나 컵을 치우면서 또 혼잣말을 했다.
"하루가 다 갔어. 어휴... 오븐렉은 또 언제 완성하냐? 환장하겠네!"
"시간 빼앗아서 미안하고! 고마워! 또 올게!"
"됐어! 당분간 오지 마! 오늘 너무 떠들었더니 힘들어. 며칠 동안 말 한마디도 안 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하하하! 그래 알았어!"
마당에서 베드로를 배웅하고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어두워진 골목은 노란 가로등 불빛이 밝히고 있었다. 바람은 쌀쌀했지만 싫지 않았다. 눈을 감고 조용히 바람을 느껴 보았다. 잎이 다 떨어진 마른나무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침에 질끈 묶었던 머리가 어느새 흘러내렸는지 덩달아 볼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일본에 있었다.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어느새 나는 이곳에 와 왔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베드로를 위로한답시고 내 이야기를 꺼냈지만 나 또한 위로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 내게도 소중한 것들이 있었지. 고마운 사람이 곁에 있었어.
새삼스럽게 모든 것들이 소중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눈을 떴다.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둠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는 않지만 걸음걸이와 실루엣만 보고도 단방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의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
그가 내게 걸어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내가 다른 복은 지지리 없어도 남편복 하나는 있네!"
남편이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쑥 내밀며 말했다.
"여기서 뭐 해? 누가 왔다 갔어? 아까 주차하려고 왔는데 차가 앞에 있길래 멀리다 대고 오는 길인데. 그새 차가 빠지고 없네?"
"응... 친구가 왔다 갔어."
나는 폴짝 뛰어 남편의 옆으로 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날도 좋은데 우리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바람이 이렇게 찬데 날이 좋다고?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었어?"
"그냥!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그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자기 먹고 싶은 걸로 먹자!"
"그러면. 치맥 할까?"
"그럴까?"
오븐렉 조립은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방금 또 생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