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바다 별
"바다 별"이 새로 쓰여 "엄마 없는 밤"이 되었습니다.
바다별은 지우려다 그냥 둡니다. 좀 더 다듬어진 글을 보고 싶으시면 브런치북 "엄마 없는 밤"을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브런치북] 엄마 없는 밤 (brunch.co.kr)
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자전적인 에세이 이기도 합니다. 처음 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힘들고 아파서 소설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소설의 매력에 빠지게 되네요. 소설의 형태를 빌어 약간의 조미료가 들어갔을 뿐 실화이고 제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명과 인물의 이름은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로 가는 길은 학교를 지나서 가는 길이다. 학교는 마을 한가운데 양지바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51년에 문을 연 고이 국민학교의 처음이 어땠는지 잘은 모르지만 마을 중심 아주 좋은 자리에 지은 것을 보면 들어설 자리를 볼 때부터 학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던 듯싶다. 학교는 그렇게 섬의 중심이고 아이들의 중심이었다.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시멘트 담장을 따라 올라가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후문이 나온다. 담장 밖으로도 길은 있었지만 굳이 학교를 가로질러서 지나가는 이유는 학교를 빙 둘러서가면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아니더라도 학교 반대 편으로 가야 할 때 어른들은 먼길을 돌아서 갔지만 아이들은 자기 집 마당을 지나가듯 운동장을 가로질러 다녔다. 오른쪽 후문은 너무도 작게 만들어져 쪽문이라고 불렸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폭이다.
학교 문은 늘 열려 있었지만 어른들은 볼일이 있을 때만 들어갔고, 아이들은 학교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취학 전인 어린아이들도 그네를 타려고 자주 들어왔다. 고이도에서 아이들에게 학교 운동장이란 놀이터이자 공원 같은 장소였고, 누가 놀고 있는지 궁금해서 일부러 지나갔고, 누가 놀고 있지 않더라도 지나가면서 구름사다리 한번, 그네라도 한번 타보고 지나가야 아쉽지 않았다.
은주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쪽문을 지날 때마다 쪽문을 이리 자주 이용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크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쪽문을 빠져나가면 학교 담장 옆으로 흐르는 도랑 위로 어른 걸음으로 크게 한걸음 이면 건널 수 있는 외나무다리가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다. 떨어질까 조심스레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갈래길 오른쪽은 교회로 올라가는 길이고 왼쪽은 영식이 물을 길어 나르던 우물이 있는 웃말로 가는 길이다.
교회로 올라가는 길 양 옆으로는 가을이 오기 전부터 코스모스가 지천이다. 햇살과 바람이 마음껏 드나드는 아무것도 거릴 것이 없는 들판에 코스모스가 풍성하게 꽃을 피웠다. 언덕을 오르는 길은 가파르게 직선으로 뻗어있는데 경사를 따라 천천히 오르려면 꽤 오르기 벅찬 길이다. 은주는 언덕을 올라가는 내내 "길을 왜 이렇게 만들어 논거야?" "교회는 도대체 왜 저기에 지어 놓은 거야?"하고 투덜댔다. 그래서 은주는 아주 천천히 올라가기로 마음먹고 예배시간 시작 한참 전에 집을 나섰다.
사방이 트여있어 바람이라도 불면 빼곡히 들어선 코스모스가 물결치며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그려준다. 논에 다자란 벼들이 바람 따라 출렁이듯이 말이다. 흰색, 자주색, 분홍색 코스모스는 무질서하게 섞여 엉망으로 자란 듯 보이지만 길가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오른쪽은 도랑이라 넘어서지 못했고, 왼쪽은 가파른 산등성이의 억샌 들풀들이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은주는 거북이걸음으로 굼뜨고 느리게 올라가면서 제멋대로 피어난 코스모스를 만끽했다. 여린 듯 가늘고 길게 자랐지만 바람과 어우러지며 태양을 향해 자유롭게 자라난 코스모스를 보고 있으면 은주도 한송이의 코스모스가 되어 바람과 햇살을 만끽하고 싶어 졌다. 벌써 꽃이 지고 맺힌 씨앗들은 비틀어 따서 주머니에 넣었다. 집에 가지고 가서 마당에 심어 보려고 씨앗을 주머니에 넣었지만 옷을 벗어 놀 때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세탁기 속에서 씨앗들이 엉겨 붙어 빨래를 꺼내던 순자가 화를 내는 것을 듣고 나서야 주머니의 씨앗들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집 마당에 코스모스 심기는 매번 실패하고 말았다. 순자의 잔소리에도 은주는 코스모스 씨앗이 다 떨어질 때까지 주머니에 넣어왔다.
언덕의 중턱을 지나면 파랗게 페인트칠을 한 슬래브지붕의 조그마한 창고 같은 교회가 나온다. 교회는 마을 어디서도 잘 보이도록 어마어마하게 큰 십자가를 달고 있었다. 십자가 아래 스피커를 두 개 달아 예배시간을 알리는 음악을 틀곤 했다. 더 오래전에는 종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교회 들어가기 전 입구에는 아이들의 신발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입구 한쪽 벽에는 널따란 신발장이 있었다. 신발장에 신발을 얌전히 벗어 올려놓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렇게나 벗어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어른들이나 제법 얌전한 아이들은 신발장에 가지런히 벗어 뒀지만 맨발의 개구쟁이들은 흙투성이에 구겨서 신어 꺾인 운동화를 아무렇게나 이리 휙 저리 휙 벗어던지고 뛰어 들어갔다. 전도사는 아이들은 맞으며 엉망인 신발들의 짝을 찾아 하나하나 정리를 하고 들어 왔다.
가끔 똑같은 신발을 신고 온 다른 친구가 신발을 바꾸어 신고 가기도 했다. 예배가 끝나고 마지막까지 남아 청소를 도와주는데 집에 갈 때 허름한 슬리퍼를 남겨두고 새로 산 신발을 홀랑 신고 도망가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학교에 등교해서 신발장을 둘러보며 신발 도둑을 가려내야 했다. 발 사이즈가 비슷한 놈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찾을 수 있었고 복도 신발장을 둘러보면 뒤바뀐 신발도 찾을 수 있었다. 어쩌다 영악한 놈에게 걸려 신발을 찾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일부러 학교에 신발을 신고 오지 않고 밖에서만 신고 다니더라는 소리를 친구들을 통해 듣기도 했다. 그럴 때는 찾으러 집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눈물을 머금고 포기를 해야 했다.
"엄마! 나 또 신발 잃어버렸어."
"새 신발을 워째 자꾸 잃어버리구 그런다니?"
"그러니까~ 아~ 짜증 나!! 교회에서 나올 때 보니까 어떤 놈이 또 내 신발을 신고 가버렸어!"
"왜 지 신발이랑 넘으 신발두 구분두 뭇 허구 신구 간다니?"
"아냐! 똑같은 신발 말고 이거 다 떨어진 슬리퍼 남겨두고 갔잖아! 이 슬리퍼 주인이 도둑놈이겠지!"
엄밀히 말하자면 도둑놈이 아니라 도둑년이었지만 은주는 년이라는 욕을 하는 것이 싫었고 놈이라고 하면 왠지 욕 같지 않아서 모든 욕을 할 때는 놈이라고 붙여서 말했다.
어쩔 수 없이 하나 남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집으로 돌아온 은주는 슬리퍼에 화풀이를 하며 저 멀리 집어던져 버렸다.
"분명히 도둑질해간 거야!! 아~ 짜증 나! 또 어떻게 찾아~ 내 신발~"
"에휴... 교회 갈 땔랑 새 신발 일랑은 신구 가지 말어!"
순자는 옷은 물려 입혀도 다행히 신발 인심은 후했고 운동화, 샌들, 구두까지 다양하게 새로 사주었다. 덕분에 은주의 속상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쩌면 은경이 신발이 다 닳도록 밖을 드나드니 허름해진 신발을 물려줄 수가 없어서 은주도 새 신발을 신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은주는 예배시간에 맞춰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교회에 갔다. 왜 가는지는 자신도 모른다. 신앙심이 불타거나 간절함 따위가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순자가 다니는 교회가 궁금해서 따라가게 됐고 같이 다니자고 하니 같이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어른 예배시간과 아이들 예배시간이 달라 따로 가야 하는데 순자의 도움이 없이도 은주는 혼자서 잘 다녔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이 없이 다닌 것은 또 아니었다. 나름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은 지키려고 노력했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었다. 필요에 의해서 가끔 본인의 의지로 기도를 하기도 했다. 은경은 아예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동생들은 가끔씩 순자를 따라서 가거나 은주를 따라서 다니기는 했지만 은주처럼 매주 꼬박꼬박 다니지는 않았다.
은주는 자신의 선택이었다기보다는 무언가의 힘에 이끌려 끌려갔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 힘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찬양이나 예배시간이 딱히 재미있는 것도 아니었고 은주의 세계를 뒤집어 놓을 만한 특별함도 없었다. 오히려 불편하고 귀찮은 것들로 넘쳐났다.
방바닥에 방석을 깔고 한참 동안 무릎 꿇고 앉아 예배를 드리다 보면 다리에 피가 잘 통하지 않았고 감각이 둔해지면서 아려왔다. 겨울이면 난방이 되지 않았던 바닥은 발이 시리기까지 했다. 거기다 은주가 6학년이 되자 같은 학년은 은주와 수연이 둘 뿐이었다. 목사인 인하는 은주와 수연이가 최고학년이라고 둘만 번갈아가며 대표기도를 시켰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 건지는 대충 눈치껏 파악을 했을 뿐이지 가르쳐 준 적도 없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무대공포증이 있는 은주에게 대표기도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기도를 미리 준비해서 읽는 것도 아니고 즉흥적으로 기도를 하라니... 평소에 밥 먹을 때 하는 주문 같은 기도나 아주 다급할 때 하는 일회성 기도 외에는 기도를 할 일도 없었고 기도와 친하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의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을 하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도록 싫었으니 대표기도는 은주에겐 고문과 같았다.
수연이가 결석이라도 하게 되면 은주는 연달아 몇 주를 기도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대표 기도가 싫다고 결석을 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고 기도 때문에 결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매번 엉터리 기도를 짧게 대충 하는데도 잘했다고 칭찬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은주도 자신의 기도가 잘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고 잘했다는 칭찬도 진실성 없는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기도는 말을 멋지게 잘한다고 잘하는 기도가 아니라던 이인하 목사의 말의 의미는 중학생쯤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유일한 교회 친구였던 수연이와는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도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은주와 수연이는 성격이 워낙 달랐고 사람을 많이 가렸던 은주는 수연이 집에 한번 놀러 가보기는 했지만 딱히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수연이는 자기 집과 친척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혼자서 교회에 오는 아이였다. 혼자서 교회를 꾸준히 다니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다. 순전히 기도나 은주 혼자 해야 하는 일들에 부담을 덜어 준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학교 친구들도 가끔 교회에 오기는 했다. 크리스마스 때나 추수감사 주일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초코파이를 나눠준다는 소식을 듣고 은주를 따라서 일회성으로 교회에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간식을 얻어먹기 위한 수작에 불과했다. 아무도 그 이후로 예배를 드리러 오지 않았다.
은주가 6학년인 지금은 이인하 목사와 그 가족이 내려와 목회를 하고 있지만 이전에도 여러 사람이 거쳐갔다. 은주의 기도 부탁으로 밤샘 기도를 해 주었던 임종길 목사처럼 서울에서 혼자 내려온 사람도 있었고 젊은 전도사 가정이 아기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대부분 오래 있지는 못하고 몇 해만 있다가 갔다.
1832년 독일인 칼 귀츨라프 선교사가 우연히 고이도에 25일 동안 머물며 선교를 하고 갔다는 이유로 고이도에는 주변의 큰 섬들에도 없는 교회가 일찍부터 생겨났다. 그리고 그 특별한 뜻을 이으려 먼 섬까지 홀로 들어오는 목회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교회에 딸린 방은 너무도 작고 불편했을 것이고 섬 내의 성도들도 몇 되지 않았으니 외롭고 힘든 선교지였을 것이다. 이인하 목사는 사모와 아이 둘을 데리고 들어와 아예 학교 앞의 빈집을 구입해서 정착을 했다. 아이들은 고이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고 학부형이나 동네 사람들과 어우러져 생활을 하면서 마치 귀촌 생활을 즐기러 온 사람들처럼 지혜롭게 섬 생활에 적응해 갔다.
이전에 전도사 사모 중에는 은주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사모도 있었는데 은주는 한 달을 채 배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피아노 개인교습을 그만둔 이유는 은주가 그 사모를 싫어해서였다. 그 사모를 은주는 눈빛 마녀라고 불렀다. 아무에게도 은주가 눈빛 마녀라고 별명을 붙인 것을 알리지는 않았다. 그냥 은주 혼자 눈빛 마녀라고 불렀다. 눈빛 마녀는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듯이 매서운 눈빛으로 사람을 쏘아보았다. 보통 목회자나 사모들은 살갑고 따뜻하기 마련이었는데 눈빛 마녀는 말수도 적은데 냉랭하고 매서운 눈매까지 지녔다. 특히 피아노를 가르칠 때는 그 눈이 반짝하고 빛나기까지 했다.
섬에서는 웬만해서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니 끝까지 배워보려고 그래도 참았다. 피아노를 배우는 내내 쏘아보는 듯한 그 눈빛이 너무도 부담스럽고 싫었다. 가르치는 동안 차가운 말투 또한 너무 싫었다. 하루라도 더 배웠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은주는 피아노 교습을 한 달 만에 포기해 버렸다. 순자는 하지 않겠다는 은주를 억지로 시키거나 꾸짖지는 않았다. 의견을 존중해서라기 보다는 굳이 이해시키고 오해를 풀어 끝까지 가르쳐 보겠다는 열성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