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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e a week Jul 29. 2017

아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둔다>

30대가 되어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엔 이거 아님 저거가 분명했지만 이젠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생긴 것이다. 전엔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해야한다,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하는 건 잘못된 것이다! 라는 명확한 바운더리가 있었다면 이젠 그 기준과 경계들이 좀 더 맹숭맹숭해졌다. 


간단히 말해 '아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이랄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또 어쩔 땐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되어 이리저리 치여보기도 하면서 좋게 말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거고 나쁘게 말하면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보호막을 쳐놓은 것이기도 하다.


아... 행복했던 휴가, 순간


이번 휴가 중에 읽은 <약간의 거리를 둔다>는 나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치열하게 산 저자 소노 아야코의 생각들을 모아놓은 에세이집이다. 매력적인 제목, 그리고 소제목, 그리고 책 표지를 자랑하는 책. 국제도서전에 갔을 때 한눈에 들어와 집어왔고 휴가 중에 읽기에 딱 적절하고 좋았던 책이다. (더불어 아주 작고 가벼워서 들고다니기에도 좋고!) 아주 깊은 깨달음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20대를 지나 30대를 맞이하며 계속 변하는 나의 모습의 끝이 저자의 생각들 처럼 말랑말랑하면서도 계속 경계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으면 해서 몇구절을 적어두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간단히 말해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있는데에도 이유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때론 그럴 수 없는 것들도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책. 


그래서 말랑말랑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이 든다. 그럴 수도 있지란 생각이 무한대로 뻗어가버려서 오히려 앞이 흐리멍텅하고 캄캄해진 나에게 '야 생각은 하고 살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좋았던 구절들을 적어보며 다시 되새김질해본다.


맛보기로, 회사는 사랑하지 않는게 좋다는 주장보다 그 이유가 좋다는 거예요!!!! (정말?)


자기다움을 유지하려면     

좋은 시절이든, 힘든 시절이든 티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매사 결과는 내 몫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탓을 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자기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지점이 발견된다. 나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나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도 나에게만 주어졌다.    

 

떨어지길 잘했다고 말할 날이 온다     

“내 실력을 못 알아보는 곳이라면 나도 싫다.”고 말해버리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운명이라는 것을 강제로 연관시킨다. 만에 하나 입사 시험에 합격해서 회사에 다녔더라면 분명 내 신상에 좋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라고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보라는 이야기다.

지나치게 낙관주의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같은 운명론을 저버리고 싶지 않다.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신께서 머잖아 “너는 다른 길을 가야한다”라는 지시를 내려주리라. 운이 나쁘다며 우물쭈물 고민하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는다.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다음 운명을 기다리는 편이 생산적이다. 나의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한 이유는 신께서 나에게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다음 단계를 준비했을 때 새로운 길이 펼쳐진다. 최선보다 차선으로 성공한 사람이 더 많다는게 그 증거다.     

모순이 생각하는 힘을 준다

세상은 모순투성이다. 그리고 이 모순은 인간에게 생각하는 힘을 준다. 모순 없이 만사가 계산대로 척척 진행되었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처치 곤란한 장애물이 되었으리라고 확신한다. 생각이라는 게 필요 없을 만큼 세상이 공리적이고, 그래서 신앙과 철학이 무의미하며 정의가 완수되어 불만이 사라진 세계는 행복할 리 없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인간답게 숭고해질 수 있는 까닭은 세상이 매우 불완전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정의는 행해지지 않고 약육강식이 난무하며, 사람들은 권력과 금전에 수시로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에 저항하고자 보다 인간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타인은 나를 모른다

우리는 가까이에 어울려 살아가더라도 바라보는 인생의 풍경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바라보고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함부로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너겨짚지 말자고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타일러왔다. 그 다짐은 이 나이가 외어서도 변함없다. 상대방을 위해 나의 희생을 감수하며 수고한 일이더라도 그가 고마움을 모른다고 해서 서운해한다거나 화를 내서는 안된다. 인간관계의 보편적인 형태는 서로 간에 뜻이 맞지 않고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오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관계가 틀어진다.     


삶의 방식에 좋고 나쁨이 없다

다른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산이 나만의 방식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는 나의 삶이 누구보다 올바르다는 신념과는 다르다. 자기 자신에게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져야 된다는 말도 아니다. 현재와 같은 모습이 최선이라는 최소한의 당당함이다.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부유한 사람을 미워할 이유가 없고, 내가 부유하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불편하게 여겨서도 안된다. 살아가는 모습은 제각각이다. 삶에는 기준도, 법칙도 없다. 

    

언제쯤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 오직 그 생각뿐

해질녘에 창밖을 바라보는데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벅차올랐다. 나는 여섯 개의 연재를 중단하고 터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언제부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휘감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다. 오직 언제쯤 저녁을 먹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있었다. ‘결핍’에 의해 얻어진 생활에 대한 실감이었다. 염려와 공포는 불필요한 것들을 소유함으로써 생겨난다.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발견한 사실들 가운데 가장 멋진 발견이었다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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