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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e a week Mar 04. 2018

사랑에 대한 다양한 모양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책의 제목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 묻지만,
정작 책을 읽고나면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이 든다.


우리가 알고있는 사랑이라는 규정은 너무나도 편협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누군가의 말에 의해서, 혹은 어떤 소설이나 드라마에 의해서, 나아가 지금 살고있는 사회에 의해서, 보여지고 정의내려진 것일 뿐. 그것이 과연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나'와 '클로이'라는 여자와의 첫 만남부터 이별까지를 그려낸다. 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이 피어나고, 클로이와 내가 사랑하는 현상들을 보여주며, 어떤 계기들로 그 사랑이 증폭되며, 또 때론 어긋나고 불안해하며, 결국 끝이 나는 과정까지를 그려낸다. 사실 그 사랑의 과정에 대한 내용이 새롭지는 않다. 누구나 사랑을 해보았으니까. 다만 그 누구나 해본 사랑을 이렇게 재미있고 통찰력있는 글로써 표현해냄으로써 보편적인 경험들을 좀 더 새롭게 그려내는 책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왜 사랑하는지보단, 대체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책의 중반부에는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주어진 정의일 뿐, 진짜 그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라 로슈푸코의 말이다. 사랑은 사회에 의해서 구축되고 규정된다. 낭만주의자들은 사랑을 종교로 만들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던 S.M. 그린필드는 <소셜로지컬 쿼터리>에 실린 글에서 오늘날 사랑은 근대 자본주의에 의해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고 말했다.

 : 자본주의는 달리 부여할 동기가 없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동기를 부여하여 개인들이 남편-아버지와 아내-어머니라는 자리를 차지하는 핵가족을 구성하도록 유도한다. 핵가족은 재생산과 사회화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상품과 용역을 분배하고 소비하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도 한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사회체제를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이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면, 혹은 사랑이라고 하면 그 사람과 나만이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우리가 만날 수 밖에 없었던 그 신기한 우연들을 덧씌우며 운명이라 여긴다. 나아가 그 사람을 알아갈수록 그 사람만의 특별하고 고유한 가치들을 발견해낸다. 그리고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이런 저러한 행동과 말을 하게되고, 그로 인해 가끔씩은 다투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닌 그냥 '너이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책 속에 두 남녀는 이 모든, 우리가 느껴온 저 사랑이라는 정의가 그저 두 사람의 인식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준다. 사실 운명적인 것 같은 너와 나의 만남은, 그 자리에 너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나왔다면 그 누군가로 충분히 대체될 수 있었으며, 상대는 전혀 특별하지 않고 나와 똑같이 약점과 이중적인 면을 갖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또한 상대를 위한 말과 행동은 사실은 나의 자의식을 발견하기 위한 말과 행동에 불과하다. 그리고 어쩌면 너를 사랑하는 이유들은 조건으로 나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한 규정을 뒤집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책에서는 앞 부분에 서술한 사랑에 대한 규정들을 사랑에 대한 증거로, 즉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로 본다. 그리고 그것이 뒷 부분에 서술한 것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 사랑이 끝이 나는 순간이라고 넌지시 이야기한다. 결국 지금, 이 사회에서 규정한 사랑에 대한 모습들을 사랑하는 이유의 근거로 삼는 셈이다.


- 우연 vs 필연

그러나 실제로 짝의 선택은 우리가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다른 테두리, 다른 비행기, 다른 역사적 시기나 사건이 주어진다면,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은 클로이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우리가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결국 우연일 뿐이라고, 5840.82분의 1의 확률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동시에 그녀와 함께하는 삶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즉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 자의식 vs 타인을 향한 마음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나라는 것은 완전한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그 유동성에 남들이 윤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내 역사를 짊어지고 나가는 것을 도와줄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나 자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때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랑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 평범함 vs 특별함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따분해보인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 걸까? 나는 클로이에 대한 내 뜨거움을 친구들과 공유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메시아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을 마주한 무신론자들처럼 세속적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기껏해야 다른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 조건없는 사랑 vs 조건있는 사랑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부유함 속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애정/소유를 얻고 유지하는 수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지켜야한다. 사랑에서건 돈에서건 오직 빈곤만이 체제에 의문을 품게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미 책 속의 사례에서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음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면서도 결국엔 그 낭만성을 다시 사랑의 이유로 회귀시킨다. 알랭 드 보통은 첫 소설인 이 책부터 가장 최근에 나왔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에 이르기까지, 낭만성을 비판하면서도 결국에는 낭만주의적인 사랑으로 결말을 맺는다. 아니, 차라리 이 소설에서는 사랑의 낭만성에 대해서 의구심을 지속적으로 표하는데 반해 최근 작품은 좀 더 낭만적 결말에 가까워진 느낌이다. (역시 나이를 먹어서일까....)




그 낭만성을 조금은 깨뜨려보고 싶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 이유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친밀함을 쌓아감으로써 자아를 형성하고 안정적인 정서를 유지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반드시 현대 사회에서 규정하는 남녀의 관계일 필요는 없다. 특히 사랑의 최종물이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기로 약속한 결혼일 필요도 없다. 사랑에 대한 이 시대의 규정을 깨뜨리면 더욱 다양한 관계가 가능하다. 남녀가 아니어도 되고,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되며, 결혼을 했다가 충분히 이혼/졸혼을 할 수 있으며, 꼭 모노가미(일대일의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폴리아모리(상호간에 인정한 다대다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선 무성애가 나올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지금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반적 사랑'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과연 어느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얼마전 보았던 영화 <Shape of Water>가 생각난다. 사랑은 물처럼 그 형태가 다양하다. 어떤 사람이 만나서 어떤 관계를 쌓아가느냐에 따라 무수히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낸다.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에 대한 대답 역시도 무수히 많은 이유를 말할수도, 또 아무런 이유를 말하지 못 할수도 있다. 너가 웃는게 좋아서 일 수도 있고, 너의 돈이 좋아서 일수도 있다. 그 미소가 변할수도, 있던 돈이 없어질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게될 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사랑하는 이유가 생겨 계속 사랑할 수도 있다. 답은 없다. 어쩌면 아주 쉽게 사랑은 그냥 의지의 발현 일수도 있다.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믿기로 하는 약속. 아니면 그냥 밀물과 썰물처럼 2년을 주기로 호르몬이 생겨났다가 없어지는대로 받아들이고 계속 새로운 사랑을 향해 나아간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모양이 없을수록 더 많이 생겨나는 것이 사랑이니까.




(여기부턴 전체 글과는 상관없지만 책에서 좋았던 부분을 안까먹으려고 적어보았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관계'이다. 따라서 사랑에 대한 규정을 내리기보단 누군가와 관계를 맺기로 했다면 오히려 인간 대 인간(혹은 인어공주? 야수? 괴물?) 으로서 관계를 나아지게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말을 못하는 여자 주인공과 야수(?)도 수화와 음악으로 관계를 쌓아갔다. (물론 성적인 친밀감까지 그려냈다는 것이 놀랍기는 했지만.)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보단 그 부분이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나에게는 두 가지 키워드가 와 닿았다. 유머와 라이트모티프.


클로이와 내가 우리의 차이 가운데 일부를 넘어설 수 있었다면 그것은 서로의 성격에서 발견되는 막다른 골목을 가지고 농담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클로이의 구두를 싫어하는 태도를 버릴 수 없었고, 그녀는 계속 그 구두를 좋아했고,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그 사건을 농담으로 바꿀 수 있는 여지를 찾았다. 말다툼이 심해질때마다 상대에게서 웃음을 끌어낼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좌절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유머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었다.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 [적어도 사랑의 90퍼센트를 이루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이다. 유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짜증의 벽들을 따라서 늘어서 있었다. 농담 뒤에는 차이에 대한, 심지어 실망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긴장이 완화된 차이였고, 따라서 상대를 학살할 필요 없이 벽을 넘어갈 수 있었다.


이것이 라이트모티프(악극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중심 악상)의 핵심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기초가 되는 장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사건으로 계속 다시 돌아가 관련을 맺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함께 이야기하는 언어는 일반적인 언어, 사전에서 정의된 담론의 언어로부터 멀이진다. 익숙함을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 두 연인이 함께 짜 내려가는 이야기와 관련을 맺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가 없는, 친밀성에 기초한 집안 언어이다. 그것은 공유된 경험의 축적을 암시하는 언어이다. 거기에는 관계의 역사가 담겨있다.

 대부분 클로이와 나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은 중요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에게 남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고, 어떤 것을 함께 겪어가며 산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함께 끌어낸 의미를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이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고 해도, 그것은 접착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 라이트모티프들이 만들어낸 친밀성의 언어는 클로이와 내가 둘이서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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