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7년의밤>
이토록 탄탄한 소설을 쓰는 한국 소설 작가가 있다는 것에 놀랐고, 작가가 여자라는 점에 또 한번 놀랐다. 여성 작가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스토리를 굵직굵직 뻗어가다보니 남성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정유정의 다른 소설인 <28>인데, 이 책은 스토리 뿐만 아니라 묘사에서까지 남성적인 느낌이 풍긴다. <7년의 밤>은 남성적인 스토리를 아주 세밀하고 오밀조밀하게 얼개를 짠 책이다. 오죽하면 책을 읽는 것이 숨이 찰 정도다.
사실 이 책은 1-2년 쯤에 읽으려고 집에 갖고왔는데 영 읽히지 않아서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다가, 최근 <이동진의 빨간책방> 팟캐스트에서 추천하는 것을 듣고 읽게 됐다. 빨책에서도 언급했지만, 첫 문장부터 참 매력적인 소설이다.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7년의 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화적인 시작이 아닐 수 없다. 시작 뿐만 아니라 읽다보면, 물론 책으로서도 더할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워낙 치밀한 묘사때문인지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할 정도다. (실제로 이 책이 출간되고 얼마 되지 않아 영화사에 판권이 팔렸다고 한다. 최근 소식을 보니 류승룡이 아버지(현수) 역으로 출연하는 것 같다. 정유정 작가의 책은 이 책 말고도 이미 영화로 제작되거나 제작 예정인 책들이 많다고하니, 영화적인 느낌이 실제 많이 들긴 하나보다.)
시작은 영화적이고, 풀어나가는 것은 저널리즘적이랄까.
엄청난 취재력과 묘사, 꼼꼼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은 7년전 밤에 일어난 사고에서 시작된다. 한 남자가 술에 취해 음주운전을 하다가 어린 소녀를 차에 치여 죽인다. 그리고 그 소녀의 아빠는 자신의 딸을 죽인 그 남자와, 그 남자의 아들인 서원에게 평생에 걸쳐 지독한 복수를 하는 이야기다. 사고와 소녀를 살해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정유정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말했듯) 그 사실 사이의 진실을 하나하나 캐나가는 것이 묘미다.
책은 현재에서 7년전 밤으로 그리고 6년, 5년, 4년.....그리고 다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을 넘나드는 구성이다. 또한 같은 사건을 두고도 주인공인 서원과 서원의 아버지 현수, 서원의 곁을 지켜준 승환, 그리고 소녀의 아버지인 영제 등 각기 다른 인물들의 시각에서 그려내고 있다. 다른 시각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실 사이의 진실이 하나하나 드러난다. 처음에 너무 치밀한 전개때문에 읽기 힘들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드러나는 진실들이 주는 긴장감 때문에 책을 놓기 쉽지 않다. 또한 책을 읽다보면 장면들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질만큼 입체적이다. 내가 읽은 부분 중에서 가장 영화같았던 부분이다. 뭐랄까. 가장 감정을 폭발시키는 부분.
그러나 파일을 닫아도, 노트북을 꺼도, 그 남자의 목소리는 끌 수가 없었다.
“서원아”
책상에서 돌아앉아 냉장고를 열었다. 문을 붙잡고 가만있었다. 뭘 꺼내려 했는지, 또 잊어버렸다. 그 목소리 때문에.
“서원아”
냉장고를 닫고 방 한구석에 옹크려 앉았다. 창밖으로 덜컹덜컹,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속에서 그가 불렀다.
“서원아”
다시는 당황하지 않을 줄 알았다. 당황할 일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다.아니었다. 전 방위에서 돌진해오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얼빠진 어린애처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거리로 나가 아무나 붙들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어째야 하느냐고. 저 목소리를 멈추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고.
(중략)
어떻게 죽었을까. 꿈에서처럼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서? 죽기 전에 어떤 마음이었을까. 무서웠을까. 아버지 손에 죽은 그 아이의 공포를 이해했을까. 떨었을까. 후회했을까. 슬펐을까. 의연하게 맞았을까. 숱한 나날, 수많은 순간, 당신이 아들 손에 죽고 또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마지막 순간에 뭐라고 말했을까. 살려달라고 애원하셨어요? 용서를 빌었어요? 설마, 설마 나를 부른건 아니겠지요?
“서원아”
끝내 그의 부름이 되살아나고 말았다.
서원아, 라고 한 마디씩 부를때마다 주인공의 감정도 내 감정도 증폭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울줄은 몰랐는데, 이 부분에서 울었다.) 어떻게 소설을 이렇게 써낼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문장이 너무 좋아서 꼭꼭 적어놓았던 부분들.
서원의 삶을 묘사한 부분
모욕당하면 분노하는게 건강한 반응이다. 호감을 받으면 돌려주는 게 인간적 도리다. 내 또래 아이들은 대부분 그렇게 산다. 아저씨는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문장에서 ‘그렇게’를 떼어내라고 대꾸한다. 나도 살아야한다.
현수(서원의 아버지)의 삶을 묘사한 부분
현수는 자신의 손끝에서 깜박거리는 담뱃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인생과 그 자신이 일치하는 자가 얼마나 될까. 삶 따로, 사람 따로, 운명 따로. 대부분은 그렇게 산다.
승환의 시각에서 본 영제와 현수의 삶을 묘사한 부분
오영제와 팀장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비슷한 수준으로 위태로웠다. 오영제는 살해당한 아이의 아빠였다. 충돌지점을 향해 폭주하는 자동차였다. 팀장은 범인일 가능성이 높았고 침몰하는 난파선이었다. 두 극점 사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게 어떤 일인지 도무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짐작할 만한 단서가 없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서원과 영제의 관계를 묘사한 부분
보이지 않는 저 창밖에 무엇이 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손이었다. 내 삶을 흔들어온 오영제의 손. 나는 그의 손가락에 낀 요요였다. 던졌다가 당기고 말아 쥐었다가 멀리 날려 보내면서 그는 7년을 기다린 것이다. 떠돌이로 만들어야 영원히 사라져도 궁금해할 사람이 없을테니까.
서원의 어머니의 독백
"그녀는 노인이 없다는 걸 자각한 지금 이 순간에야 ‘안다’와 ‘인식한다’의 차이가 뭔지 깨닫고 있었다. ‘안다’는 다음의 문장으로 바꿀 수 있었다. ‘노인이 수고가 많다’. ‘인식한다’는 ‘내 존재 자체가 구멍이다’였다."
마지막으로 적어둔 건, 정유정 작가 특유의 문장 스타일?! 이 보이는 부분
"나는 멱살을 잡힌 듯이 7년 전 여름으로 끌려갔다."
"돌 사진만큼이나 낡아빠진 추억이 끌려나왔다."
"그녀의 귓속에선 동맥이 똑딱거리기 시작했다."
같은 의미도 이런 표현 방식으로 인해 굉장히 다르게 느껴진다. 좀 더 긴장감 있게 쓰여진 문장들. 이런 문장들이 모여 책 전체의 흡인력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문장과 스토리로서 모두, <7년의 밤>은 소설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를 보여준 책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읽은 소설 중에 가장 소설 답지 않은 소설이자, 가장 소설 다운 소설이었다.
꼼꼼한 취재는 소설답지 않은 현실성과 사실성을 부여해주었고, 뚝심있는 스토리가 이끄는 전개는 그 어떤 소설보다도 힘이 있게 느껴졌다. <빨간책방>에서 말하길, 정유정 작가는 집필을 시작하면 시골집으로 내려가 몇 개월 간 소설을 위한 취재와 글쓰기에만 집중한다고 한다. 그리고 책이 나오면 소설 홍보를 위해 잠시 서울에 왔다가 다시 집필을 위해 시골집으로 내려갈만큼 글에 대한 집중력이 엄청나다고하니, 소설의 탄탄한 완성도는 바로 이러한 작가의 노력과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싶다. 실제로 그녀의 작품들을 쭉 살펴보면 꼭 2~3년 주기로 단 한권의 소설을 내놓고 있다. 게다가 정유정 작가는 다른 작가들에 비하면 늦게 소설가로 데뷔했다고하니 (원래 간호사로 일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심사직으로 근무했었다고 한다.) 앞으로 쓰여질 작품이 더 많아 보이는 작가라는 점에서, 얼마나 더 멋진 소설을 보여줄지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