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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May 15. 2019

보국문 앞, 정릉4동

맑은 개울이 흐르는 북한산 자락 밑 작은 마을

푹푹 찌는 8월의 여름, 땡볕에 온몸은 불타는 것만 같았다. 서울에 어디 조용하고 시원하게 지낼 곳이 없었던가. 문득 시원한 계곡물소리가 듣고 싶었다. 지도를 살펴보다가 찾아낸 정릉동.


때마침 새로 개통된 우이신설선 경전철이 있어 북한산보국문역에서 내리면 어렵지 않게 정릉동에 도착했다. 지하철로 동대문까지는 15분이면 가니 산골이지만 생각보다 도심까지의 거리가 멀지도 않고 교통도 좋다. 북한산에 오르려는 등산객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북한산보국문역은 정릉동 중에서도 정릉4동에 닿아있다. 옛날에는 ‘청수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오래전부터 북한산 계곡의 맑은 물 때문에 ‘청수(淸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일제 시대 때는 일본인이 자신의 별장으로 쓰기도 했고, 이후에는 ‘청수장’이라는 여관이 아예 있었다고 하니 일찍이 이미 이 터는 핫했던 모양이다.


역에서 나와 사거리 횡단보도를 지나면 바로 청수동 초입이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교통도 많이 발달했으니 도심으로의 빨대 효과로 동네가 죽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있었는데, 오히려 외통수 지역이니 동네 사람들이 멀리 나가지 않고 동네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부분도 큰 데다가 등산객들이 이렇게 쏟아져 오는 것을 보면 소규모의 상권으로는 비교적 나쁘지 않다고 보였다. 메인 도로라고는 2차선의 보국문로 하나이니 도로를 기점으로 생활권이 딱히 쪼개지지도 않는 것 같다.


보국문 가는 길에 소소한 재미는 경국사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건너면 극락행일 것만 같은 ‘극락교’ 다리를 건너 일주문 안으로 계속 걸어가다보면 경내는 굽어진 오르막길을 돌아야만 그 모습을 보인다. 속세의 때를 다리에서부터 다 털고 올라오라는 무언의 지시인 것만 같다. 경내에는 사찰을 끼고 흐르는 정릉천의 졸졸졸 물소리가 소소하게 울려 퍼진다. ‘절세권’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진 모르겠지만, 분명히 서울 몇 없는 역사적인 사찰이 동네에 있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일 것이다.


사찰을 나와 보국문으로 걸어 올라가는 건 메인도로보다는 아무래도 좁게 나있는 정릉천 산책로가 훨씬 매력적이다. 깨끗한 산바람이 불어오면서, 경국사 담 너머로 뻗은 나뭇가지들은 계절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하며 정릉천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거리는데, 봄에는 꽃잎이, 여름에는 푸른 잎들이, 가을에는 단풍잎들이 정릉천을 따라 흘러 내려간다. 겨울에는 바위 위로 소복히 눈이 쌓이는데, 그 뒤로는 눈을 잔뜩 맞은 북한산이 제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 압권이다.


산책로를 걷다가 만나는 푯말에는 정릉에 터를 잡고 지내던 유명 작가와 예술가들이 소개되어있다. 대표적으로 소설가 박경리는 정릉에서 대망의 소설 <토지>를 3권까지 집필했다고 한다. 산장연립 앞 다리에서 ‘토지’라는 글씨가 쓰인 벽화 옆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실제 박경리가 거주했던 가옥이 있는데, 지금은 7~13세를 대상으로 하는 작은 대안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옛날 건물을 그대로 유지한 채 노오란 페인트로 칠한 대문이 인상적이다. 소설가가 직접 살며 창작의 시간들을 보내던 집이 이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내재된 잠재력을 일깨우는 창조적 공간이 되었다는 건 어쩌면 이 곳만이 불러일으키는, 시대를 초월한 예술적 기운이 실제로 이 주변을 계속 맴도는 건 아닐까.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일제 시대 이후 사대문 안에 살던 문인들의 일본인들의 등살에 밀려 이 곳으로 이주해 산 것이 시초라는 다소 안타까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박경리 외에도 청수장에서 화가 박고석과 한묵, 이중섭 등은 서로 왕래를 하며 작품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산으로 둘러싸이고 개울이 흐르는 이 곳에서는 무엇이든 그리고 쓰고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집필을 위해 나도 이 곳에 방을 빌려 지내보는 것이 어떠려나. 이 곳에는 숙박시설이 전무하지만, 에어비앤비에는 마당이 있는 2층의 조용한 주택, 가히 ‘정릉’느낌의 집들이 조금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청수장에는 아파트보다도 지어진 지 좀 된 연립이나 빌라, 주택들이 즐비하여 ‘여기가 서울인가’라는 의심마저 들게 한다.


몇 동 없는 아파트 중에서 눈에 가장 확 들어오는 것은 ‘산장아파트’이다. 이 아파트는 1977년 완공되어 이제 40년이 훌쩍 넘은 조상급 아파트지만, 아직까지도 튼실하다. 요즘 아파트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가동’과 ‘나동’ 2동으로 이루어졌으며, 11층 높이의 12호 복도식으로 구성되었다. 산을 바로 맞닥뜨린 지리적 요건 상 여름에는 산바람으로 세상 시원하다는 주민들의 쏠쏠한 후기들도 눈에 띈다. 리모델링으로 내부만 조금 손을 본다면 꽤 저렴한 가격에 괜찮은 집이 될 수도 있겠다.


정릉천 산책로를 끝까지 올라가면 징검다리가 보이며 산책로가 끝이 난다. 여름에는 동네 웃통을 벗은 아이들이 신나게 물장구를 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소백산 기슭의 어느 계곡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이 곳에 대한 동경은 이런 목가적인 풍경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산책로 끝자락에서 다시 보국문로와 만나 조금 더 올라가면, 비로소 정릉탐방안내소를 시작으로 정릉유원지가 펼쳐지고, 북한산 국립공원이 시작된다. 이른 아침에는 산행을 하는 등산객들로 북적북적하고, 점심 무렵부터는 산행을 마친 등산객들의 막걸리 잔 부딪치는 소리로 구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정릉유원지에서는 보국문 또는 대성문으로 올라가는 두 개의 등산로가 있다. 산행이 부담된다면 주차장 옆 화장실부터 시작하는 북한산 둘레길 5코스를 걸어보아도 좋다. 정릉에서 시작하는 둘레길은 국민대 뒤를 지나 북악터널을 끼고 평창동으로 이어진다.




본격적으로 산행길이 시작되기 전 쯤, 정자 아래서 잠깐 앉아서 쉬다가, 이젠 다시 보국문역 쪽으로 돌아간다. 버스 차고지 2곳이 이 곳에 있어 조금은 북적북적하다. 보국문로를 따라 계속 내려가면, 피오레 아파트를 지나 바로 ‘청수탕’이 있다. 근래에는 보기 드문 옛날목욕탕이다. 등산객들이 등산을 마치고 이 곳에서 몸을 씻는다. 시설이 노후했으나 잠시 쉬어가기에는 손색이 없다.


이 주변에는 그래도 병원, 베이커리, 편의점, 마트, 치킨집, 카페 등 많은 가게들이 결집해있다. 버스차고지를 출발한 버스가 처음으로 도착하는 버스정류장이 이 곳에 있어서, 상권도 이 정류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일과를 마치고 친한 이웃끼리 삼삼오오 마셔 이 근처에서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그렇게 다시 보국문역까지 내려오면 청수장 구경은 끝이 난다.


간혹 시간이 좀 더 허락한다면, 정릉천 산책로를 따라 좀 더 걸어내려간다. 정릉천변을 낀 좁은 골목을 조금 들어가면 예쁜 벽화가 그려진 ‘킨폭스 카페’를 만난다. 인테리어도 훌륭하고, 야외 테라스와 루프탑도 있어 커피 한 잔하며 잠시 쉬어가기 좋다. 동네의 젊은 청년들은 다 이 곳에서 모이는지, 늘 사람들이 가득하다. 정릉천도 작은 개울인데, 이 카페도 기껏해야 단층에 옥상 테라스가 있다보니, 그 아담한 매력이 배가 된다.


날이 좋을 때는 산책로에서 개울장도 열린다. 일종의 플리마켓인데, 산책로가 좁다보니 벤더와의 거리도 가까워 매대에 올려진 상품들에 조금 더 눈길이 가기 쉽다. 형형색색의 천들이 산책로 위를 가리면서 햇볕을 가려주고, 다리 위에서 그 전경을 보면 자연스레 사진을 찍기 십상이다. 그렇게 걷다보면 정릉시장에 이른다. 대형마트가 없는 정릉에서는 이 곳에서 장을 보는 것 같다. 온갖 맛있는 냄새가 골목을 메우는데, 골목 자체가 길거나 넓지 않다보니 시장이 밀도있다. 골목 중간중간 청년들이 운영하는 작은 베이커리와 디저트 가게들도 보인다. 개울장부터 정릉시장까지 하나로 이어지는 이 모습에서 똘똘 뭉친 이웃들이 서로 정답게 지내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릉시장에서 갓 구운 빵 하나를 입에 넣고 보국문역으로 향했다.


보국문로에서 멀어진 고갯마루의 주택들은 노후한 곳이 많아 어쩌면 나중에는 재개발이 이루어져 더 이상 현재의 정릉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산이 병풍처럼 동네를 감싸고 맑고 깨끗한 물이 도랑을 따라 흐르는 이 풍경만큼은 꼭 오랫동안 보고 싶다. 오래된 친구와 여름날 정릉천 징검다리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으며 실컷 산들바람 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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