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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Nov 07. 2015

마지막 휴양지

Dubrovnik, Croatia

"어느 나른한 잿빛 오후 내가 지루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내 상상력은 무시당하는 게 분했던지 휴가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시인 워즈워스가 말한 ‘마음의 눈’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니면 그냥 이 세상 어딘가에 놔두고 온 것이다.

나는 화가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앞으로 어떻게 일하고 그림을 그리고 살아갈까? 나는 추억의 조각들에 매달려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았다. 친구여, 추억은 낡은 모자일 뿐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새 신발이지. 새 신발을 잃어버렸다면 가서 찾아보는 수 밖에 달리 무슨 수가 있을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책, 로베르토 이노첸트의 <마지막 휴양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지막일 것만 같은 이 곳에 도착했습니다. 플라차거리에는 사람들이 북적이네요.

외딴 곳 도착한 호텔, 어쩌면 내가 지금 있는 두브로브니크와 같은 이 곳. 나는 동화 속 인물들 처럼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이 여행을 떠났습니다. 한국과는 정말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이 먼 동유럽 땅에서 나는 무엇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나의 커리어에 대한 대답일까요?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내 눈앞에 펼쳐진 동유럽의 자연과 아름다움? 일부는 될 수 있겠지만 전체를 설명해주진 못합니다. 매우 특별하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것? 여행에 따른 부산물은 될 수 있겠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바퀴가 고장난 나의 캐리어 가방을 들고 계단을 올라 숙소로 올라갔습니다. 숨이 가빠오고 이내 땀으로 가득했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30분 정도 낮잠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두브로브니크에서는 누구도 만나지 않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인연을 만날 생각도 없었어요. 나는 꼭 그 해답을 찾아야 했거든요. 이제 다시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내 앞과 맞서야 하기 때문에 그 답을 꼭 찾아야 했습니다.



비오는 날의 성벽투어. 우산 들랴 사진 찍으랴 정신은 없었으나 꽤나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휴식 후 나는 우산을 들고 성벽투어를 시작했습니다. 이내 하늘은 어두워지고 거센 비와 함께 천둥번개가 쳤습니다. 사람이 가득했던 성벽 위는 이내 인적이 드물었지만 나는 계속 걸었습니다.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껴야했습니다. 이 비마저, 이 천둥번개마저 나에게 답을 줄 수 있다면요.


그 동안 나를 이겨내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았습니다. 1년 뒤가 아닌 내일에 대해 걱정하던 시기도 있었구요. 오늘 밤 별 고통 없이 잠에 들 수 있을까. 가끔은 오늘 밤 내가 잠이 들면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조금은 극단적인 생각들도, 그렇게 몸이 고통스러웠고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하루하루 나의 삶을 죽여가고 있던 시절엔 종종 마포대교를 지나가며 강물의 유속이 생각보다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죠.


여행의 시작은 이 모든 좌절 속에 시작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찾고 싶었습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바로 그것을. 그렇게 하나 두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때 여유가 되는 만큼 시간을 할애해 나는 전력을 다했지만,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았던 이번 여행도 결국 별다른 수확을 걷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딱 반반씩 먹었으면 좋았을텐데, 어차피 점심도 굶었겠다, 다 먹어치웠습니다.

이내 나는 시가지로 돌아와 지나가던 중 좋은 냄새가 나는 식당을 발견했습니다. 문어햄버거와 문어샐러드를 파는 이 곳에서 나는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한 후, 늘 그랬듯이 라슈코 맥주를 한 캔 구입하여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습니다. 비가 그치고 해가 지는 이 순간을, 이제 그것을 찾기 위해 시공간을 투자하는 이 행위는 오늘로써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넓은 그 푸르름에 황금빛들이 하나 둘씩, 장식을 완성시킵니다.

케이블카로 올라간 스르지 산 정상에서 나는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구시가지에는 하나둘씩 빛을 밝히는 건물들로, 하늘은 점점 푸른빛을 잃어가고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 바람이 부는 산 정상에서 1시간을 서 있었습니다. 머리부터 어깨를 흘러 발끝까지 웬지 모르는 편안함이 혈관을 따라 흘러내려가고 있었죠. 이제 그만 고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답이 없는 질문을 오래토록 고민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나에게 필요했던 건 모든 것을 잊기 위한,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휴양지.


마지막을 달래기 위한 밤거리 걷기. 목적지는 없습니다. 골목을 계속 끼고 돌아봅니다.

‘지금’이라는 순간을 처음 살아보기에 나는 이 치열한 세상 속에 씩씩한 척하고 당당한 척 하지만,  그럼에도 매 순간이 아쉽고 아플 뿐이니, 어쩌면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하나하나씩 포기하고 단념해야 하는 순간이 올지라도, 다시 삶에 있어 용기가 필요하다면, 1막을 마무리하고 2막을 화려하게 열고 싶다면, 두려워하지 많고 마지막 휴양지로 떠나고 싶습니다. 돌아가는 일상에서 더욱 견고해진 나를 기대해봐도 좋을까요.




2017년 1월, <떠나, 오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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