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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Oct 19. 2016

무적(無籍)의 용사

Santa Monica, USA

그 어느때와 다름없는 정기적인 휴가로 예정되었던 여행.


그러나, 여행을 목전에 앞두고 회사를 나왔고, 졸지에 이 여행은 퇴사라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어느 한 굵고도 얇은 사건에 대한, 의미부여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밤 12시에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고, 당일 오전에 라스베가스에서 LA를 비행기로 이동했다. 그래서 LA는 어느 한 지점만 골라서 스리슬쩍 보고 나오기로 했고, 그렇게 해서 낙점된 곳은 산타모니카 해변이었다.



산타모니카, 그 이름만큼은 숱하게 들어봤던 곳. 한창 영어를 공부할 때 왜 그렇게 여자들은 하나같이 뉴저지와 산타모니카 출신인지. 사실은 미국을 가기 전까지는 산타모니카가 LA에 붙어있는지도 몰랐는데, 마치 옛 동네 소꿉친구 - 윤지, 희진, 지영 - 등의 이름처럼 어딘가 다정다감했다. 아마, 이름이 익숙한 탓이겠다.


산타모니카에는 모래사장도, 해안도로도, 산책로도, 공원도, 널찍하게 자신들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파도가 연신 시원한 소리를 만들었고, 날씨가 아직은 따뜻하다고 할 만한 날씨인지,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 여느 때와 다름없던 그 곳의 금요일 오후.


그리고, 산타모니카를 오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이 표지판 하나 때문에.


한때 미국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길, ‘루트 66’.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밥 딜런도 한 때는 꿈꿨던 미국 서부 여행의 시작이자 끝이 되어준 길. 미국에서는 'Mother Road'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미국 근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길이다. 시카고부터 시작해서 그랜드캐년 앞을 지나 마지막 종착지가 바로 이 곳 산타모니카였다.


종점을 알리는 표지판은 빈티지함을 앞세워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어왔는지. 파란 하늘과 더 선명하게 대조되면서 바다를 향해 이 곳이 길의 종착점임을 알리고 있었다.


아, 끝났구나.

일도, 여행도 모두, 이제 끝났구나.

돌아가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좋아하고 잘하는 것부터 해볼까.

그런데, 내가 잘하는게 뭐였지.

내가 좋아하는게 뭐였지.

딱히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책을 한 권 읽었다.


'나는 왜 이것을 하고 싶을까?'

하고 싶은 게 명확한 사람들이 있다. 어릴 때부터 그 목표를 위해 열정을 불사르며 스스로 타오르는 태양과 같은 사람들.

그러나 나는 달빛과 같은 사람이었다. 주위의 인정이 없다면 스스로 빛날 수 없는 사람. 세상이 원하는 것을 나의 목표로 설정하며 나는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 장수한, <퇴사의 추억>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엔 사실 초조하거나 걱정이 되기 보다는, 외려 가볍다. 신은 어쩌면 퇴사를 통해 내게 원 페어가 아닌 로얄플러시를 만들라고 카드덱을 셔플하신게 아닌가 싶다. 혹은 치열한 이 게임을 떠나거나.


물론, 새로운 일을 아직 찾지 못했고, 정기적으로 들어오던 수입이 없으며, 간사하게도 아침에 조깅을 하다가 출근하는 회사원들을 보면 안타깝다가도 부러움의 마음이 피어난다.


적(籍)이 없어진다는 것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없어진다는 것이었고, 어쩌면 더더욱 외롭고 고독한 시간들을 잘 이겨내야 함을 의미했다. 집돌이가 되기에 더더욱 최적의 조건이었고, 사람들로부터 나를 좀 감춰야 할 것 같았다.


이 시간들은 '근로'로 인정되지 않는다. '백수'라는 단어에서 어딘지 모를 한심함이 느껴지고 그것이 자칫 '그러길래 당신도 미리 공부를 좀 해서 안정된 곳으로 자리를 잡지.'등과 같은 내 지나온 길과 인풋에 대해 부정하고 마는 당착의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밀렸던 책과 드라마 영화를 보고, 산책을 하고, 일본어 공부도 하고, 집안일도 부지런히 하며, 안해봤던 요리도 해보는 이런, 도무지 생산활동과는 멀어보이는 일련의 일상들을 무시하지 않고 소중하게 여겨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당시 End of Trail을 보는 순간 울컥했던 마음은 무엇으로 설명이 될 수 있을까. 분해서였을까. 슬퍼서였을까. 후회를 한걸까. 아마 이제 혼자 서서 나아가야 함을 깨닫고, 일전에 그 모든 겁과 두려움과 불안을 표출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늪을 헤쳐나갈 나는, 무적(無籍)의 용사다.




2017년 1월, <떠나, 오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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