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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Apr 18. 2016

기억을 잃는다는 것

조금씩 잃어가는 파편에 대해서

꼬마 시절 가족끼리 바닷가로 여행이라도 가는 날이면, 꼭 할아버지는 나에게 어느 도시를 거쳐갔는지 읊어보라고 하셨다. 강릉까지 가기까지 하나하나 도시의 이름을 말씀해주시는 것들을 고스란히 기억했다가, 할아버지가 중간중간 물어보시는 질문에 마치 끝말잇기처럼 하나도 빠짐없이 외우곤 하였다.


딱히 지금처럼 엄청난 교재의 홍수에 살지 않았기에, 숫자는 시 당국에서 나오는 전화번호부를 보고 익혔다. 집 전화, 할아버지 댁 전화를 지나 고모네 등 친척들 전화번호는 거뜬히 외울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사실 누구나 하는 것일지도.




어느 순간부터 사소한 것들에 대해 기억을 잃는 것 같다.


일례로, 지난 주말 나는 둘도 없는 형한테 몹쓸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형 말로는 했다고 한다. 청자가 있는데 화자가 없을리가 없다는 이 명백한 근거는 형과 나의 술자리 내내 나를 괴롭혔다. 내가? 형은 화가 났다. 했는데 안했다고 내가 잡아뗀다니.


아는 동생은 미국에 일하러 가 있다. 미국의 삶을 거의 매일같이 물어보는데 질문이 꽤나 중첩이 되는 모양이다. 동생이 답답해한다. 집중도의 문제인 것인지. 동생은 꽤 자주 '전에 얘기해줬는데'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조금은 짜증이 2% 들어간 어투로 다시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나는 꽤 타인의 말을 잘 듣는다고 생각한다. 듣고 공감도 충분히 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포인트를 빠르게 캐치하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이 얘기해도 내가 기억을 못하니, 그들은 그들의 상황을 나에게 인지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1장부터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물건을 놨음에도 어디 있는지 종종 잊는다. 술 한 잔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 번호가 생각이 안나서 핸드폰을 켜지만 내가 찾는 어플이 어디있는지 바로 찾기가 힘들다.




사진을 조금 더 많이 찍을 것이다. 특히나 술 한 잔 함께 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다이어리에는 어느 날 누구를 만났는지 적어놓는다. 그 날 그 사람이 입었던 옷, 우리가 갔던 맛집 혹은 술집, 그 곳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면 그 곳에서 피었던 이야기거리가 다시 머리에 아른거릴 지도 모른다.


글을 좀 더 많이 쓸 것이다. 오늘 밤이 지나서 한 여름밤의 꿈처럼 그저 스쳐 사라지기 전에 조금 더 기록으로 남길 것이다. 그건 사진으로 담길 수 없는 무언가이기에 조금은 시간을 들여서 글로 남길 것이다.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나는 내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글을 읽으면서 그 때를 추억할 것이다.


매 년마다 하나의 마일스톤과도 같은 추억을 남길 것이다. 그건 아마 여행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매 년은 조금 어려울 수 있겠지만 그래도 노력할 것이다. 한 살 한 살마다, 나의 자취를 남겨, 나를 돌아볼 것이다. 동행인이 있다면, 동행인과 그 추억을 공유하는 것도 방법이다.


미래를 위해 돈을 모으는 건 조금 어려울 지도 모른다. 기억을 하기 위해선 현재에 충실해야 하고 현재를 과거로 넘기는 데에 필요한 노력과 비용이 상당 부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수명의 여부는 내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그건, 신만이 알 것이다. 그러니 미래를 위해 현재를 무조건 적으로 양보하는 일은 삼가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언젠가, 혹시, 그대를 기억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지워버렸다면, 그대도 나를 지워라. 아파하지 말고. 물론 그대가 나를 지울 때 나는 매우 아플 것이다. 나는 그대를 무의식적으로 지웠기 때문에 그 사실에 대해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거나 어떻게든 풀어보려 할 것이지만, 나의 이런 상태에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하고 너는 늘 그런 식이지 라는 반응이 많을테니. 그냥 그렇게 나의 기억도 수렴되게 만들고, 새로운 기억을 다시 1부터 쌓는게 나을 수도 있겠다.


비록 그럴지라도, 나는 나의 사람들의 귀중한 이야기와 용기를, 본의 아니게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도 않고 아직은 화가 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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