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접할 준비가 되어있는가를 되묻다
카우치서핑이라는 서비스가 있다. 비영리를 목적으로 (운영에 필요한 약간의 자금을 제외하곤) 전세계의 여행자와 호스트를 연결해주는 서비스이다. 사실 처음엔 한창 배낭여행에 목매인 시절, 현지에 있는 친구들도 만나고 불필요한 경비를 줄일 수 있었던 천혜의 기회이자 마인드를 온전히 바꿔주었던 녀석이다.
그렇게 해외에서 2-3회 정도 사용해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생각지도 못한 호의를 받게 되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나를 맞아주었던 그 호스트는 이스탄불에 있는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서 근무하는데, 근무 쉬프트까지 바꿔가면서 나의 이스탄불 시내 투어에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비록 영어를 유창하게 하진 못했지만, 느꼈다. 순수하게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것을.
내가 누렸던 그 호의를, 누군가도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도움이 되는 상황에. 때마침 작년엔 그럴 수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호스트가 되었다. 여름 시즌에 맞춰서 연 탓인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집에서 체류해도 되냐고 요청해왔다. 마치 회사에 입사하는 많은 인재들의 자기소개서를 살펴보는 느낌이었다. 신청할 때 몇 가지의 질문이 다음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왜 이 호스트의 집에서 머무르고 싶나요?" "본인이 호스트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그에 대한 답을 읽어내려가면, 사람이 조금은 보이는 듯 하다. 사실, 그 사람의 진면모는 끝내 확인할 수 없다. 신청할 때 그 사람이 써내려갔던 글과, 나를 만났을 때 내가 지각했던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실제 그와는 많이 상반되는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알고, 판단할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기에 나는 그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수락한 3명 정도의 사람은, 실제로 우리 집에서 잘 지내고 갔고, 아주 깔쌈한 여행상품의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머물러있던 시간에 비해 많은 것들을, 특히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의 실 상황을 보고 느끼고 즐겼을 것이라 생각한다.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적, 지금도 조금은 마찬가지겠지만, 손님을 받는 것에 두려움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그렇게 인심을 크게 쓸 정도로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생일 파티 한번 정도는 친구들을 모아 할 만도 했는데, 학교 앞 분식집에서 엄마가 쥐어주신 만원 한 장으로 통 끄게 쏜 것과, 억지로 이 친구 저 친구 불러 열 세살 무렵 결국 부랴부랴 했던 집에서의 생일파티 정도가 생각난다.
친구가 없어서 집에 못 불렀던 건지, 집에 부를 수 없어서 친구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상관관계에 있는 이 불편한 두 사실은 늘 나를 조여왔다.
그리고 또 하나 느낀 점은, 우리 집에서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것에 그렇게 익숙해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들이 눈 앞에 닥쳐올 때면 그럴 만도 하겠다. 당장 집안에 외간의 사람이 오는 것에 불편함이 들 것이다. 집이라는 것은 나의 공간이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누군가 들어왔을 때 한 구석이 좀 어색한 건 자명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에 손님을 데려온다는 것은, 물론 아무나 데려오는 것은 아니지만, 실로 큰 마음을 먹고 보이는 행위라 생각한다. 집의 구조, 가구, 물건의 배치, 전체적인 분위기 등 사람이 살기에 아주 많은 요소들이 공간을 구성하고 있고, 손님은 이를 통해 이 집에 거주하는 사람을 읽는다. 주인도 이것을 미리 알기 때문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는 것.
그러니 집에 손님을 초대한다는 것은 그 불편함을 조금은 감수하고서라도, 나의 진짜 삶을 보여준다던가, 나의 가족들을 보여주며 나의 가족들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경계를 풀고 나를 조금 더 보여주는 것이다. 나 또한 나와 이제 좀 가까이 알아도 좋고, 이미 그렇게 되고 있는 사람들을 가족들에게 보여준다. 많지는 않다. 서울 집이야 얼마든지. 고향집은 가족들에게 물론 미리 동의를 구한다.
결혼할 상대의 집에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흔히 말하는 '상견례의 이전 단계'는 이러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찾아가는 사람은 아직은 잘 모르는, 낯선 집과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나의 공간이 아닌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나의 존재를 조금씩 상대방들에게 드러내는 것. 집주인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어떤 요리를 내올지, 손님이 불편함을 느낄 구석은 없는지,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할지 하는 고민을 한다.
이 열띤 고민과, 첫 만남 후 정적 혹은 어색함을 뛰어넘는다면, 대부분은 좋은 관계로 나아가기 쉽다. 이 다음부터 초대한, 혹은 초대해준 그 사람을 만나면 가족들의 안위를 묻거나, 새로 알게 된 그 사람의 취미 혹은 관심사를 묻거나 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 사람을 좀 더 깊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 걱정할 필요가 있나
내 생각에 집에서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즐기는 파티나 모임은 유독 한국에서 찾기가 힘들다. 끌신 신고 나가면 얼마든지 식당도 많고, 술집도 많기 때문. 그 곳에서 사실 퉁치면 그만이다. 요리할 필요도 없고, 치울 필요도 없고, 넘나 편한 것.
참 희한하리만큼 그런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결속이 되는 속도가 기대만큼 빠르진 않다. 술집이나 밥집은 이미 다른 사람들도 함께 공유하는 공간이기에 왁자지껄하고 대화도 하기 힘들다. 내가 돈을 내니 니가 내느니 더치페이를 하느니 하는 실랑이도 생기고. 집으로 초대하면 뭐 그럴 걱정 없이 손님은 준비해가는 작은 성의를 정성스레 전달하고, 주인은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손님에게 대접하면 된다.
꼭 완벽한 한 상일 필요도 없다. 내 공간에 누가 오는 것에 대해 너무 경계를 가질 필요도 없다. (혹여나 그런 부분이 있다면 조금 치우거나, 시간이 조금 지나서 손님을 맞으면 된다.) 그렇게 손님을 맞다보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순간들이 생긴다. 이타와 이기의 밸런스를 그렇게 맞춰가면 되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