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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Sep 01. 2016

글로 배운 리액션의 경계

'공감'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공감이라는 키워드는 참 '모범적인' 말입니다.


영화나 드라마, 문학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리거나 매우 기뻐할 경우가 있다면 공감하는 능력이 어느 정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말하는 카타르시스는 바로 이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글쎄, 그렇다고 공감력이 높다는 것이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도 같습니다. 올해 초 경영매거진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서는 '공감의 한계'라는 글과 함께 비즈니스에서 공감할 때 부딪힐 수 있는 문제점을 제시했습니다.


공감은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무거운 부담을 주고, 무한한 자원도 아니며, 심지어 사람들의 윤리적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공감을 과도하게 요구할 경우, 성과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공감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 이 글은, 공감이 절대적으로 옳은 길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칫 내가 이만큼 공감하는 데 상대는 그렇지 않을까 하는 차이에서 본인만 힘들어지니까요. 다만, 누군가에게 공감을 하고 싶을 때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부분에 대해 느낀 대로 쭉 써내려가려 합니다.




공감은 마음 속으로만 진행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보통의 경우 그 감정이 밖으로 표현되거나 (자연적으로) 혹은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의도적으로)


이 경우 표정과 감정의 변화가 생기기도 하고,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리액션을 행합니다. 최근 제가 느끼는 리액션에 대한 뉘앙스는 자연적이기보다는 의도적인 공감에 가까우며, '내가 너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 '나만큼 니 얘기 잘 들어주는 사람도 없어.'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TV에 나오는 연기자들은 그것이 드라마이든, 예능이든 이 리액션을 요구받습니다. 어떻게보면 그런 매체에 있어 브라운관에 나오는 출연자들끼리 케미가 맞아야 하고 마치 핑퐁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싸이클이 있어야 하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TV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남들보다 좀 더 잘 웃어주고,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슬픈 이야기엔 같이 마음도 아파합니다. 그렇다고 TV가 전적으로 저에게 100% 영향을 끼쳤다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감정선을 증폭시켜준 장치 정도로 생각합니다.


공감의 타입을, 제가 분류할 수 있는 선에서 나눠봤습니다.




좀전에 이야기한 감정선이라는 부분은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애초에 그런 것이 발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학습화된 리액션과 공감이 독이될 수 있다는 것이죠. 역시 절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리액션과 공감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감정선이 역으로 생겨날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다만, 그렇지 못한 경우엔, 조금 어색하거나 당황스러운 상황이 전개되기도 합니다.


와~ 역시 백수단 선배님. 호오~ 완전 무대를 뒤집어 노셨따
맛있음의 최상급 표현 (마리텔 기미작가)


뭐가 좋은 리액션이고 나쁜 리액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 공감을 함께 하다가도 간극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하는 대화 중 '아, 그래? 아 그렇구나~' 에 대한 부분은 저 스스로에게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입니다. 사실은 그렇구나하고 따라가지 않는 상황에 말이라도 먼저 꺼내 의식적으로 따라가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저는 이 공감과 리액션이 전반적으로 개선될 때 훨씬 부드럽고 깊이있는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관계를 더 좋게 하는 것은 물론이구요.


하지만 이것은 글로 배워서 된다기보다는, 선천적으로 공감력이나 감정의 예민성이 차이가 있을 것이고, 후천적으로 노출된 환경과 사회가 다릅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본연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한다면 공감과 리액션을 할 때 큰 어색함이 없을 것입니다.




황현산 교수가 쓴 '밤이 선생이다'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책을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참 마음에 드는 구절이라 곧 읽어볼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난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그래서 때때로 세월호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 아픔을 나누고 유가족들의 안위와 감정을 잘 추스리게 옆에서 돕는 사람들에게서 저는 존경심이 듭니다. 그 너머의 목적을 바라는게 아니라, 순수하게 그 문제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은 분명 단절되는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혼자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니까요.


점점 더 나의 목소리와 의견을 낼 수 있는 공간과 기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1인 미디어다 무어다 해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표현하기 쉬워지고 있습니다. 브런치를 쓰고 있는 저도 같은 입장이겠지요. 그만큼, 어쩌면 더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을 부족하게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튼, 공감버스에 타고 안 타고는 각자의 선택이겠지요. 다만 버스에 만약 탄다면 잘 타길 바라고, 그 버스의 종착지가 분명 더 나은 곳에 내릴 것임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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