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공감이라는 키워드는 참 '모범적인' 말입니다.
영화나 드라마, 문학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리거나 매우 기뻐할 경우가 있다면 공감하는 능력이 어느 정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말하는 카타르시스는 바로 이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글쎄, 그렇다고 공감력이 높다는 것이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도 같습니다. 올해 초 경영매거진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서는 '공감의 한계'라는 글과 함께 비즈니스에서 공감할 때 부딪힐 수 있는 문제점을 제시했습니다.
공감은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무거운 부담을 주고, 무한한 자원도 아니며, 심지어 사람들의 윤리적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공감을 과도하게 요구할 경우, 성과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니 이 글은, 공감이 절대적으로 옳은 길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칫 내가 이만큼 공감하는 데 상대는 그렇지 않을까 하는 차이에서 본인만 힘들어지니까요. 다만, 누군가에게 공감을 하고 싶을 때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부분에 대해 느낀 대로 쭉 써내려가려 합니다.
공감은 마음 속으로만 진행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보통의 경우 그 감정이 밖으로 표현되거나 (자연적으로) 혹은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의도적으로)
이 경우 표정과 감정의 변화가 생기기도 하고,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리액션을 행합니다. 최근 제가 느끼는 리액션에 대한 뉘앙스는 자연적이기보다는 의도적인 공감에 가까우며, '내가 너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 '나만큼 니 얘기 잘 들어주는 사람도 없어.'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TV에 나오는 연기자들은 그것이 드라마이든, 예능이든 이 리액션을 요구받습니다. 어떻게보면 그런 매체에 있어 브라운관에 나오는 출연자들끼리 케미가 맞아야 하고 마치 핑퐁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싸이클이 있어야 하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TV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남들보다 좀 더 잘 웃어주고,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슬픈 이야기엔 같이 마음도 아파합니다. 그렇다고 TV가 전적으로 저에게 100% 영향을 끼쳤다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감정선을 증폭시켜준 장치 정도로 생각합니다.
공감의 타입을, 제가 분류할 수 있는 선에서 나눠봤습니다.
좀전에 이야기한 감정선이라는 부분은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애초에 그런 것이 발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학습화된 리액션과 공감이 독이될 수 있다는 것이죠. 역시 절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리액션과 공감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감정선이 역으로 생겨날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다만, 그렇지 못한 경우엔, 조금 어색하거나 당황스러운 상황이 전개되기도 합니다.
뭐가 좋은 리액션이고 나쁜 리액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 공감을 함께 하다가도 간극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하는 대화 중 '아, 그래? 아 그렇구나~' 에 대한 부분은 저 스스로에게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입니다. 사실은 그렇구나하고 따라가지 않는 상황에 말이라도 먼저 꺼내 의식적으로 따라가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저는 이 공감과 리액션이 전반적으로 개선될 때 훨씬 부드럽고 깊이있는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관계를 더 좋게 하는 것은 물론이구요.
하지만 이것은 글로 배워서 된다기보다는, 선천적으로 공감력이나 감정의 예민성이 차이가 있을 것이고, 후천적으로 노출된 환경과 사회가 다릅니다. 그 차이를 인정하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본연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한다면 공감과 리액션을 할 때 큰 어색함이 없을 것입니다.
황현산 교수가 쓴 '밤이 선생이다'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책을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참 마음에 드는 구절이라 곧 읽어볼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난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그래서 때때로 세월호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 아픔을 나누고 유가족들의 안위와 감정을 잘 추스리게 옆에서 돕는 사람들에게서 저는 존경심이 듭니다. 그 너머의 목적을 바라는게 아니라, 순수하게 그 문제에 대해 공감하는 능력은 분명 단절되는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혼자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니까요.
점점 더 나의 목소리와 의견을 낼 수 있는 공간과 기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1인 미디어다 무어다 해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표현하기 쉬워지고 있습니다. 브런치를 쓰고 있는 저도 같은 입장이겠지요. 그만큼, 어쩌면 더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쓸 수 있는 시간을 부족하게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튼, 공감버스에 타고 안 타고는 각자의 선택이겠지요. 다만 버스에 만약 탄다면 잘 타길 바라고, 그 버스의 종착지가 분명 더 나은 곳에 내릴 것임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