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바뀌면 변할 수 있다. #TCI변화 #MBTI #정신과이후변화
나는 어떤 사람일까?
자기 계발서들을 볼 때마다 타고난 천성을 살려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 날 때부터 나 자신을 또렷이 관조해 와서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확고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게 내가 후천적으로 쌓아온 가면인지 아니면 진짜 내 모습인지 누가 알겠는가.
더욱이 나는 나 자신에게 부정적인 편이라 객관적인 내 모습이 어떤지 알기 힘들었다. 부족한 면만 봐서 오히려 장점을 잘 모르겠다. 대부분의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점을 지적받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막상 "그래서 온초 님은 기질적, 성격적 장점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3초 안에 떠오르는 게 없다.
나의 타고난 천성은 어떤 것일까?
그래서 다양한 심리테스트가 유행하는 것 같다. "당신은 사막을 걷고 있습니다..." 같은 가벼운 테스트부터 MBTI같이 패턴화 된 자신의 성향에 대한 전문적 심리 검사를 받기도 한다. 특히 MBTI는 내가 어릴 때보다 최근 들어 어떤 SNS에서나 계속 언급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서로 어떤 타입인지 얘기하고 어떤 타입과 궁합이 어떤지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대학 때 취업 세미나에서 짧은 온라인 테스트가 아닌 직접 설문지를 작성하고 결과를 기관에 의뢰해서 받는 전문적인 MBTI를 받아보기도 했다. 당시의 나는 온라인 검사나 전문 심리 검사 모두 동일하게 "INTP"가 나왔었다.
그때 결과지를 받고 MBTI별로 그룹을 나눠서 간단한 과제를 수행해 봤는데 성향별로 정말 결과가 달랐다. 일단 여행계획을 세우라는 과제에서 P와 J로 나눠서 계획을 세웠는데 P는 기본적으로 시간보다는 우선순서에 맞게 일정을 짰다. 일단 여행지를 크게 산과 바다 정도로 나누고, 1순위로는 바다를 본다. 2순위 회를 먹는다 이런 식으로 쭉 마인드스톰을 하고 쭉 작성했다.
그리고 반대팀의 결과물을 봤는데, 그쪽은 시간을 기준으로 작성했었다. 몇 시에는 뭘 하고 싶다거나 몇 시에는 뭘 하고 싶은지 찬찬히 얘기를 나누고 진행한 것 같았다. 상당히 꼼꼼했고, 단순 과제임에도 정해야 한다는 확고함이 있어서 대신 시간은 오래 걸렸다.
확실히 유형별로 차이가 나는구나, 내 성향은 이렇구나 싶었다.
MBTI에서 나아가 최근에 나는 TCI 검사를 두 번째 받았다. MBTI가 4가지 기준을 가지고 2갈래로 나누어 16개 유형으로 나눈다면 TCI는 기질과 성격으로 나누어 각각 4가지 척도로 높음(H), 중간(M), 낮음(L) 3개로 나누어 성격과 기질 각각 27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 조금 더 상세한 검사였다. 조금 더 문항이 많은 편이었고, MBTI와 달리 개인의 병리적인 상태도 볼 수 있다고 해서 정신과 초진 때 종종 권하는 검사였다.
나도 정신과에서 초진 때 검사하고 1년 만에 다시 한 검사였다. 병원을 가지 않게 됐기 때문에 스스로 염려도 되어서 점검하는 생각으로 다시 보고자 했다.
요즘은 기술이 발전해서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검사를 진행하고 TCI 기관으로 송부한 후 나온 결과를 다시 받는 식으로 집에서도 바로 심리 검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다만 유료였다. 이전에 받은 결과지와 나란히 두고 비교한 결과는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위험회피 점수는 여전히 높았지만, 얼마 없던 자극추구가 갑자기 한도까지 치솟아 있었다. 사회적 민감성도 마찬가지로 껑충 뛰어있었다. M-H-L(자극추구, 위험회피, 사회적 민감성 순)에서 갑자기 H-H-H가 나온 것이었다. 성격적인 부분이 아닌 TCI 기질적인 부분에서 나타난 결과의 차이라서 더욱 놀라웠다.
TCI에서 성격은 후천적으로 갖게 되는 것이고, 기질은 선천적, 신체적으로 타고난 것이라 성격은 바꿀 수 있어도 기질은 변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성격적 특성보다는 기질이 갑자기 훅 바뀐 것이다. 물론 긍정적인 변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전에 의사 선생님이 내 불안(회피)에 비해 자극추구가 너무 낮아서 쉽게 행동하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게 걱정이라고 하셨었는데 지금은 자극추구가 많이 높지만 차라리 다행인 것 같다.
무서워도 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긴 느낌이고, 그걸 확인받은 것 같아서 나는 기뻤다. 사회적 민감성도 매우 낮았었는데 그때의 나는 아마 사회적으로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지레짐작 아래에 스스로 관심이 없는 척 닫아둔 상태였던 것 같다. 남이 뭘 하든 궁금해하는 순간 그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없던 시기였던 셈이다.
내친김에 MBTI도 정확하지 않은 약식 온라인 테스트를 다시 해보았는데 결과가 또 달라져 있었다. 나의 T적 면모는 어디 가고 F였다. 남들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감정에 대한 공감도 높게 나온 것이다. 이성적 사고도 중요하지만 마음도 중요하다는 걸 강하게 느껴가는 것 같다. 특히 내 마음에 대해 인지하고 공감하려 노력하게 된 이후로는 남과 내 감정 모두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경우 타고난 기질이 바뀐 걸까?
진심으로 노력하면 바뀔 수 있다고 나는 믿지만, 이 경우에는 원래의 나를 되찾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렸을 때부터 겪어온 일련의 트라우마적 사건들에 대한 반향으로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나 감각이 터진 것 같았다. 기질도 기질일 테지만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오래도록 겪어왔던 상처가 있다면 마치 그게 원래 자신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것 같다.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아서 그게 진짜 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곳저곳 부딪히다 보니 알이 깨지듯 새롭게 재정의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무척이나 의기소침하고 우울했던 때는 병리적인 측면도 있어서 치료 후 큰 변화가 나타났던 것 같다.
나만 이런 상황에 놓여 있었던 건 아닐 것이다. 즉, 천성으로 판단했던 성향이 사실은 특수한 환경에 의해 형성되었거나 병리적인 상태에 놓여서 보인 반응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우울하고 혼자 있고 싶은 날이라면 아무리 외향적인 사람이라도 혼자 에너지를 충전할 시기가 필요하고, 트라우마나 상처가 너무 깊다면 모든 걸 다 회피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때때로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싶어 진다면 상황을 바꿔보면 좋겠다. 감성이 메마른 것처럼 느껴진다면 자조하지 말고 슬퍼해보자. 남에게 소홀하게 대하게 된다면 체력이 떨어지진 않았는지 할 일이 너무 많은 건 아닌지 생각해 보자. 스스로 너무 싫은 날마다 가만히 울지 말고 주변은 어떤지, 자괴감보다는 처한 상태가 나를 그렇게 몰아간 건 아닌지 생각해 보는 나였으면 좋겠다.
이미지 : Maria Tyutina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752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