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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와,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 그대로

- Nirvana, <Come as you are>

by 히피 지망생

TV 다큐멘터리 출연 제안을 받은 적이 2번 있습니다. 한 번은 캠핑카에서 사는 동안, 또 한 번은 출간 직전에 제안을 받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번 다 거절했습니만, 솔직히 두 번 다 솔깃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 장래희망(?) 중 하나는 여행작가이고, 유명해지면 출간이 쉬워진다는 사실을 그때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요즘 TV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 해도 TV는 TV입니다. 몇 분일지라도 인물의 삶에 포트라이트를 비추는 프로그램이라면, 폭풍이 꽤나 크겠죠. 문제는 그 후폭풍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다큐멘터리 출연을 제안해 주신 작가님께 답장을 보냅니다. 핵심은 간단했습니다.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다른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행복이 기본값이던 시절이었죠. 답장을 보내고 나서도 후회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 제안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습니다. 책 출간 직전에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책 홍보에 이보다 좋은 기회가 있을까 싶더군요. 게다가 작가님이 출연을 제안한 프로그램은 이름만 대면 전 국민이 알만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저는 정했습니다. 가장 나다운 길을, 나답게 걸어가기로.


어떤 결정을 했는지 힌트를 드리기 위해 잠깐 자기소개 시간을 갖겠습니다. (갑자기 분위기 '아이엠 그라운드') '뜬금없이 왠 자기소개?'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위에서 제가 '다운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고 했죠?'나다운' 결정이 뭔지 알려면 제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어린 시절, 저는 극도로 내성적인 아이였습니다. 학교 전학 가면 보통 선생님이 자기 소개시키잖아요?그때 우는 아이가 저였어요. 당연히 존재감은 제로였죠.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교사가 되고 만난 적이 있는데요. “저 기억하시나요?”라고 물어봤다가 '누구...'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시길래 뻠쭘해 죽는 줄 알았니다. 그러던 저는 고등학교 3학년 어느 날, 지난 18년간 잠자고 있던 ‘내 안의 관종 DNA’를 깨우게 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 공감하시겠지만, 수업이란 게 참 재미 없죠. 이렇게 날씨 좋은 날, 나는 왜 딱딱한 의자에 앉아 미분, 적분이나 배우고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졸게 되고, 음 바이러스는 금세 교실 전체로 전파되죠. 그럴 때 센스 있는 선생님은 학급의 분위기메이커를 호출하곤 했습니다.


"다 자네?안되겠다. 나와서 웃겨볼 사람?"


이럴 때 늘 나와서 웃기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날따라 피곤했는지 안 나가더군요. 다들 누군가가 나가서 이 지루한 시간을 떼워주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손을 드는 학생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저였습니다.(이때 왜 손을 들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 교실 안에 있던 모두가 놀랐지만, 가장 놀랐던 건 저 자신이었습니다. 교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동안 친구들 모두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게 느껴졌습니다. 전 잘 할 수 있을까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되도 않는 개인기를 방출했는데 본래 얌전하던 애가 자기 돌변하는 모습을 보이면 재밌잖아요?그날 이후로 저는 '조용히 공부만 하는 아이'에서 '수업이 지루할 때 부르는 우리반의 구세주'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기대치는 올라가고, 개인기는 떨어져가고... 나중엔 정체성의 혼란도 찾아왔습니다.


'내성적이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나,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떨지 않고 무대 위에 올라갈 수 있는 나. 도대체 어느 게 진짜 나일까?'

제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외향적인 나가 진짜 나다.'


그렇게 믿고 살았습니다. 대학교 OT 첫날, 입학생 전체 대상으로 한 베스트 새내기 선발회에도 당당히 1등을 지했습니다. 눈 떠보니 인싸 새내기가 되어 있더군요. 솔직히 피곤했습니다. 사람 모인 자리마다 웃겨보라하니 늘 개인기를 준비해야했죠.

'대학은 조용히 다니려고 했는데...그래도 괜찮아. 난 외향적 성격이니까' 이렇게 스스로 위로하며 대학 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요. 그렇게 20대 내내 외향적 성격으로 살았어요.



뭔가 이상하다 느낀 건 서른이 넘어서부터였어요. 어떤 게 진짜 나일까?그때, 글이라는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글을 쓰면 자연스레 자기가 걸어온 길을 되밟게 됩니다. 내가 했던 선택들을 돌아보고, 그 선택들이 갖는 의미를 되짚어보게 됩니다.


그때 난 왜 그랬을까? 난 어떤 사람일까? 어떤 게 진짜 내 모습일까? 는 뭘 할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 사람들하고 어울려 놀 때? 무대에 올라가서 장기자랑을 할 때?


아니었어요.

혼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밤바다를 곁에 끼고 걸을 때.

미지의 세계로 모험 떠날.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고 내가 목표한 바를 이뤘을 때 또는 목표가 눈앞에 가까워짐을 느낄 때.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을 때,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를 볼 때,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들을 때, 글을 쓸 때

...


그때 깨달았습니다. 언젠가부터 사람이 많은 곳을 피했던 이유를. 정기적인 모임 부담스러웠던 이유를. 그 사실을 깨은 날, 모든 모임에서 탈퇴했던 이유를. 하루에 한두 시간은 혼자 걸으며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던 이유를.


저는 사실 내향적 사람이었던 거죠. 번째 다큐멘터리 출연을 제안한 작가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죄송하지만 방송 출연은 도저히 못하겠다고. 책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기회인데 아쉽지 않냐고요? 아쉽지 않습니다. 책을 전국적으로 홍보를 잃은 대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으니까요.


커트 코베인이 말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되어 사랑받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미움받는 게 낫다"



저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사랑도 받아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커트 코베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는 지금도 너바나의 <Come as you are> 전주만 들으면 심장이 두근두근 댄답니다. 전주 뒤에 나오는 한 문장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에서 내뿜는 피의 온도가 적어도 0.2도쯤은 뜨거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Come as you are

내게 다가와,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 그대로


왠지 'Come as you are' 뒤에 '(내가 사랑해 줄게)'나 '(내가 꼭 안아줄게)'가 생략되어 있을 것 같지 않나요?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제 눈을 보며 이 노래를 불러주면 제 심장은 멈춰버릴 지도 모릅니다. 무 설레어서. 그러니 제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를 생각이시라면 심장 자동제세동기도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덧붙임]

언젠가 저의 책이 나오게 된다면, 해 질 녘 경치 좋은 곳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맥주 한잔 하며 북토크하는 상상 해봅니다.(너무 김칫국 한 사발 드링킹인가요? 상상은 자유니까요.) 북토크 이름은 이미 정했습니다. <Come as you are>.

그날 그곳으로 오십시요. 있는 그대로의 당신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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