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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 라이프 2 - 집 구하기

내친김에 '생활필수품 없이 살기' 실험 보고

by 히피 지망생

서른여덟의 생애 첫 자취생활, 내친김에 '생활필수품 없이 살기' 실험 보고서.


미니멀 라이프도 집이 있어야 가능한 법.

일단, 살 집부터 구해보자.

일단 직장 근처의 원룸을 알아보기로 했다. 제주도 부동산 폭등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데다가 TV, 냉장고, 세탁기 없는 집을 고르려니 선택의 여지가 더 좁아져 시작부터 난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활필수품이 모두 갖춰진 집을 원하다 보니 나 같은 미니멀리스트 지망생은 갈 곳이 없다.




때마침, 여동생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공무원 아파트 추첨에 당첨되어 다음 달에 급하게 이사를 가게 됐단다. 그 말인즉슨, 지금 살고 있는 전셋집이 10월까지 빈다는 뜻이다.

내가 관리비 7만 원만 내고 살면 나는 7만 원에 살 집을 얻게 되어 좋고,

동생은 살지도 않는 집 관리비를 대신 내 줄 사람이 생기니 좋고,

이거야 말로 윈-윈(win-win)이다.

집주인에게도 허락을 얻었다. 집주인 입장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세입자를 얻기 쉬울 테니 윈-윈-윈(win-win-win)이다.


그리하여 현관문을 열면 범섬이 보이는 멋진 집으로 단돈 7만 원에 이사를 가게 되었다.

평소에도 불필요한 것들은 집에 두지 않는 편이라 승용차로 세 번 만에 이사를 마무리했다. TV, 냉장고, 세탁기 등 생활필수품은 하나도 없으면서 서핑보드, 잠수복, 오리발, 각종 캠핑용품 등 레저 용품이 내 짐의 절반을 차지하는 걸 보며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는 뭘 할 때 행복한 사람인지, 나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 답은 언젠가 내 삶의 정체성에 대해 내린 결론 그대로다.


‘내 삶의 정체성은 히피와 보헤미안 사이 어딘가에 있다.’




주류의 흐름을 거스르는 삶은 때로 불편함을 몰고 온다. 사람들이 대세를 따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걸었던 길이기 때문에 나도 그 길을 따라가면 최소한 편하게는 걸을 수 있을 거라는 불안 회피 심리.


나에게도 그런 넓고 쭉 뻗은 길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대세와 관성을 거부하고 사람들이 많이 걸어 편평해진 길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걷지 않는 길을 찾아다니는 이유. 길이 없다면 길을 내어서라도 내 길을 걸으려 하는 이유.

이 길 어딘가에 그들은 느끼지 못하는 뭔가가 있음을, 일생의 지속적인 모험과 잦은 뻘짓, 더 잦은 시행착오들을 통해 느껴왔기 때문이다. 이건 뭐랄까, 어차피 내려올 거면서 산에 왜 오르냐고 묻는 사람에게 ‘산에 올라봐야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기 때문 아닐까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다.




여기, 주류의 흐름을 거슬러 비주류의 길을 가다 못해 홀연히 자연 속으로 걸어갔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존 크라카우어의 책 『인투 더 와일드』는 전 재산을 국제 빈민구호단체에 기부하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야생의 한 복판으로 떠나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삶을 살았던 청년,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여기서의 자연은 Nature의 뜻을 갖고 있기도 하고, ‘스스로 자, 그러할 연’의 뜻을 갖고 있기도 하다. 대자연속에서 스스로 그러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았으니 '자연'스럽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존 크라카우어의 책 『인투 더 와일드』
숀 펜이 제작, 감독한 영화 『인투 더 와일드』

그의 이야기는 숀 펜이 제작, 감독한 영화로도 각색되었다. 영화는 실제 결말과는 별개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나답게’ 살아갈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따라옴을 주인공은 마지막 사진을 통해 전한다.

(영화의 결말 때문에 아직도 그의 선택에 대한 찬반이 분분한데, 존 크라카우어의 책에 사건의 내막에 대한 자세한 뒷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에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의 실제 모습




크리스토퍼처럼 언젠가 자연 속으로 떠나는 삶을 꿈꾸며 TV, 냉장고, 세탁기 없이 지내본 한 달.

나는 비로소 해방되었다. 소유로부터, 불안의 굴레로부터,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그동안 내 생활에 생긴 변화에 대해서는 '생활 필수품 없이 살기 보고서' 에 계속.

(https://brunch.co.kr/@hanvit11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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