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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다 Aug 28. 2024

임신의 안 좋은 추억

임신이 행복한 기억만 있는 건 아냐

저번 글의 분위기를 이어받아 두 번째 글을 작성해 본다.


마늘이는 우리 부부에게 불시에 찾아왔다. 용용이는 원래 자녀계획 없이 둘이 재밌게 잘살자는 의견이었고 나는 그래도 자식이 있었으면 좋겠으나 신혼생활을 즐긴 뒤 적어도 일 년 뒤에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둘 다 강경한 입장은 아니었기에 굳이 피임을 하지는 않고 생기면 낳자의 속 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최소의 방어선은 지키고 있었다.) 책임감 없이 지낸 결과 결혼 4개월 만에 마늘이가 찾아왔고 둘 다 벙쪄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기뻤고.


당연히 임신은 축복이고 행복 그 자체이지만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임신으로 인해 슬펐던 기억 두 가지를 꺼내 글로 풀어보겠다. 첫 번째는 임신 초기의 기억이다. 나는 백화점 수입 브랜드 담당 디자이너였다. 그리 크지 않은 기업이었기에 디자이너가 매장 디스플레이도 맡았어야 했다. 신상품이 나오면 실장님과 전국 롯데백화점을 다니며 진열을 했었다. 또 임신 즈음에 사장이 직접 디자이너들을 쪼며 매출이 안 나오는 이유를 물으며 다니곤 했다. 몸과 정신에 무리가 왔으나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곧 진급을 앞두고 있었고 파리에서 열리는 메종오브제 박람회 출장이 내 차례였기 때문이다. 버티고 있던 나에게 주변 동료들의 염려가 시작되었고 월요일이 되면 배가 더 아팠다. 용용이의 걱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아이를 잃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유산방지 주사를 맞기도 했고.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이였지만 잃게 되면 죄책감이 굉장히 클 거 같았고 사실 돌아보면 그때 지쳐있기도 했었다. 실장님께서는 내 상태를 보시고 인수인계 없이 3일 만에 회사를 정리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그 뒤 자연스럽게 우울감이 찾아왔다. 같은 업계 종사했던 용용이를 파리 출장 보낸 밤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혼자 엉엉 울었다. 


10월에 임신 사실을 알았고 배가 적당히 불러왔을 때 겨울이 시작됐다. 용용이는 내 걱정을 하며 임신부는 몸이 따뜻해야 한다고 내 손을 이끌고 인천 신세계백화점으로 향했다.(지금은 롯데백화점으로 바뀌었다.) 노스페이스 매장으로 가서 나에게 검고 두툼한 패딩 점퍼를 골라주었다. 참 따뜻했다. 따뜻해진 몸과 다르게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임신 전까지 내 인생에 아웃도어 브랜드 옷은 없었다. 의류를 전공하고 직업으로 삼은게 꽤 오래되었다. 고집 센 디자이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얼어 죽어도 코트 인생을 살았던 나였다. 그때는 자존심이 상해서 눈물이 난 줄 알았다. 그러나 되돌아보니 내가 없어진 기분이었다는 걸 이제와 깨달았다.  임신과 동시에 나는 김진희가 아니라 임신부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뭘 좋아하고 취향이 어떻든 간에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나에게 많은 것을 제약했고 판단했고 배려했다. 그때 차 안에서 왜 눈물이 나는지도 모른 체 서글픔을 숨겼는데 살아보니 알겠다. 


원래 임신 기간엔 호르몬의 영향으로 과도하게 슬프고 예민하고 그렇다. 다른 일들은 잊히는데 이 두 가지 슬픔은 영원히 기억날 거 같다. 왜냐면 아직도 그때의 내가 느낀 감정이 생생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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