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다니고 있는 한*리에서 학부모 독서모임을 모집한다 하여 참여하게 되었다. 오늘이 첫 번째 책을 읽고 모이는 날이었다. 60프로는 꼼꼼히 읽었지만 나머지는 읽어야 할 부분만 읽었다. 완독하지 못하고 토론을 할 수 있을까 우려되었지만 큰 무리가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첫 번째 독서모임이 끝나고 바로 두 번째 책을 받았다. 책의 제목은 [자기결정의 원칙]이다. 목차를 읽고 프롤로그를 읽은 뒤 제1장을 시작하였는데 책을 읽어 내려가기 전 선택에 대한 내 생각을 끄적이고 싶어졌다.
가끔 신세에 대한 한탄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분명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육아는 왜 이렇게 힘들지?
난 왜 이 사람과 결혼했지?
어째서 이 집에 이사 온 거지?
저 과장은 왜 날 고달프게 하지?
이러한 생각에 매몰되는 순간이 있다. 세상이 온통 흐리고 모든 일이 날 우울하게 만드는 것만 같은 날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어쨌든 다 나의 선택으로 인해 생겨난 일이라는 거다.
육아로 고통받는 나를 부모로 만든 것은 나의 선택이고 나를 화나게 하는 반려자도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겠다 마음먹고 친인척을 불러 모아 결혼식을 올렸고, 퇴사를 고민하게 하는 직장도 내가 이곳에서 일하겠다 생각하여 이력서를 제출한 것이다.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면 탓할 곳이 사라져버린다. 내 얼굴에 침 뱉는 꼴일 뿐이니까. 어쩌겠는가 어처구니없게도 모두 다 내가 자초한 일이다. 그럼 그다음부터는 무엇을 하게 되느냐 내 선택을 타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나는 옳은 선택을 한 거야.라고 자기 위로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하게 된다. 나는 나를 지켜주고 싶으니까. 살아오며 점점 깨닫는 것은 결국 끝에는 나와 나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아닌 나와 나 자신만이 남기 때문에 나를 돌봐야 한다.
하지만 결국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 든다면 그 또한 인정해버리면 된다. 그리고 그때 하지 못한 더 나은 선택을 떠올려본다. 그다음 지금 할 수 있는 차선책을 바로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롸잇나우. 당장
하지만 아쉽게도 어떤 때는 실행에 큰 어려움을 느낀다. 실천하지 못하는 온갖 변명들을 이야기한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시간이 없어서,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같은 이유는 수도 없이 댈 수 있다. 이럴 땐 사실 그냥 하고자 하는 의지가 모두 소모되었거나 필요 이상으로 지친 것은 아닐까. 그럼 그땐 나를 다시 다독여주자.
‘그래 난 최선을 다했어. 이제 어쩌겠어?’
나를 돌보며 호르몬이 안정되길 기다리면 된다.
작년부터 러닝을 시작했다. 아이를 기관에 보내고 달리기를 하는데 비슷한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운동을 하다 보니 자주 만나는 얼굴들이 있다. 내적 반가움을 느끼며 달리곤 하는데 2주 전 엄청난 광경을 목격했다.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사람이 있었다. 항상 깔끔한 운동복 차림으로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산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는데 그날은 뛰고 계셨다 아주 빠른 속도로. 발에 유모차가 치일 수 있으니 왼손으로 유모차를 밀고 유모차 오른쪽으로 달리더라. 유모차를 밀며 달릴 수 있나 놀랬던 순간도 잠시. 그 핸들링이 어찌나 부드럽던지 유모차 안의 아이는 세상모르고 쿨쿨 잘 자고 있더라. 그렇게라도 운동을 실천하는 그분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본인이 내린 선택과 결정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분 앞에서는 아이가 어려 운동을 못한다는 변명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날은 과거 변명하는 나에게 프라이팬으로 머리는 한 대 때리는 날이었다.
난 달라. 난 못해. 이런 생각에 잠식되면 영원히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계속 남 탓, 환경 탓하며 사는 것이다. 잘나가며 부지런히 사는 사람들 보고 대단하다, 부럽다 할 뿐인 거다. 한 발 앞으로 나가보면 두 발은 쉬워진다. 긍정적인 사람과 자주 만나며 도움을 받아보자. 나도 그분들에게 활력을 얻곤 한다.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고 발전시키는 굉장한 분들이 주변에 찾아보면 여럿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부모든 친구든 옆집 사람이든 잘 모르는 지인이든. 그 사람들의 노하우를 쏙쏙 뽑아내서 훔쳐 쓰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도 몰래 다가가 쓱 훔쳐서 내가 따라 쓰고 있다.
난 대체로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편이다. 이것은 살아오며 얻어낸 경험치인데 세상 자신만만했던 내가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얻어냈다. 나만 잘난 것 같던 20대 후반을 지나며 나보다 잘나다 못해 날아다니는 능력자들에게 팩트 폭격을 맞으며 자기 객관화를 얻었다. 또 나에게 날아오는 애정으로 포장한 꾸중과 질타는 자존심으로 중무장한 나에게 빡침과 분노만을 안겨주었었지만 그들의 말을 수긍하면서 타인이 보는 나를 인정하게 되었고 그것 또한 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굉장한 발전이었다. 스스로도 이해 못 했던 나를 타인이 이해시켜주는 경험은 특별했고 나를 입체적으로 생각하게 도와주었다.
또 요즘은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세세하게 떠올리며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난 계획적이지만 게으르고 지적여보이고 싶지만 깊은 지식이 부족하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지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길 원한다. 부족한 지식. 그리고 지성인으로 보이고픈 욕구를 책을 가까이하며 충족시키고, 게으르지만 성실히 사는 사람으로 보이고픈 욕구는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행동하려 노력한다. 내가 원하는 나와 본 기질의 나를 적당히 섞어 살면 스스로 갈등을 빚는 일을 줄일 수 있었다. 책을 사랑하진 않지만 난 지성인이 되고 싶어. 그럼 책을 들고 다닌다. 곁에 두면 결국엔 한 장이라고 읽게 되고 어쨌든 간에 책을 읽는 지성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거다. 나를 위로하며. 흐흐흐
이렇게 나는 나를 알아간다. 내가 했던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고 나를 다독이기도 하며 나와 적당히 타협하고 산다. 그리고 나에게 더 나은 인생을 살게 해주려 애쓰며 산다.
난 잘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