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눈 떠보니 유부녀, 나의 결혼기(4)
멋진 외국 생활에 대한 동경.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신혼을 일본에서 보냈어요'라고 하면 대부분 '어머 좋았겠어요'라며 부러워한다.
그러면 나는 그냥 웃지요. 흐흐흐흐.
외국에서의 폼 나는 삶은 금전적으로 풍족한 부자들만의 이야기이다.
남편과의 불협화음으로 가뜩이나 힘들었던 외국 생활에 더더욱 불행의 불씨를 지핀건 금전적인 문제였다.
그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남편은 일본 IT 회사에 신입으로 입사하여 기본급 19만 엔 정도에 분기별로 성과급을 받았었는데, 철없는 신혼부부는 뭣 모르고 좋은 신혼집을 덜컥 계약해 버렸다. 무려 월세만 7만엔(그 당시 한국 돈 100만 원)이나 되었다.
쥐꼬리만한 월급의 거의 반절 정도를 집세로 냈으니 물가 비싼 일본에서 나머지 돈으로 생활하기에 너무나 빠듯했다.
집세를 빼고 남은 돈에서 남편 용돈 2만엔 내 용돈 2만엔 생활비(식비, 생필품 비 등) 2만 엔에 그 외에 자동차 기름값 각종 세금 등을 내고 남은 금액은 저금을 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대단했다. 아무리 아이가 없었다고 해도 생활비를 한국 돈 20만 원 초반으로 책정하다니 심지어 물가 비싼 일본에서. 바보가 아니면 자린고비였을 것이다.
그렇다. 남편은 지독한 자린고비였다. 이 모든 집 안 경제의 결정과 돈 관리는 남편 담당이었다.
남편은 1엔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는 남자였다. 그 증거로 모든 가게의 물건 가격을 다 외우로 있었다. 1엔 단위까지.
어떤 물건을 사기 위해서 다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제일 저렴한 곳까지 가야 했다.
외식은 언제나 100엔짜리 회전스시와 스키야(아저씨들이 주로 가는 저렴한 덮밥집)였고 그것도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갈 수 있었다.
과일은커녕 야채도 풍족하게 사기 힘들었다. (실제로 포도 딸기 등은 일본에서 먹어본 적이 없는 듯하다.)
일반 마켓은 자주 못 갔지만 다행히 근처에 브라질 근로자 가족들이 모여사는 60년 된 임대 아파트 단지 안에 엄청나게 싸게 파는 마트가 있어서 주로 거기에서 장을 봤다.
특히 오렌지(1개에 한국 돈 100원)를 엄청 싸게 팔아서 오렌지만은 실컷 먹었던 기억이 있다.
금전에 얽힌 남편의 자린고비 에피소드는 정말 무궁무진하게 많은데 그중에 하나를 이야기하자면,
명절 기간 도쿄까지 가는 고속도로 통행요금을 심야시간 이용 시 천 엔(만 3천 원)으로 해주는 때가 있었는데 이걸 이용하려고 나고야에서 밤 12시에 차를 몰로 도쿄로 간 적이 있었다.(일본은 고속도로 요금도 대중교통비도 참 비싸다. 기름값이 그나마 싸다)
처음엔 별생각 없이 '남편이 또 기발한 생각으로 돈을 아끼는구나' 하며, 심야 여행의 낭만을 꿈꾸며 가볍게 따라나섰다. 그러나 도쿄는 넘나 먼 곳이라 날이 밝을 때까지도 도착할 수 없었고 심야 운전은 너무나 졸려서 여행의 낭만 따위는 없다.라는 교훈을 얻으며 무사히 도쿄에 도착했으나 하루 만에 그 교훈을 잊고 우리는 돌아갈 때도 같은 방법을 선택했다.
돌아오는 길 우리 부부는 계속된 졸음운전으로 고작 몇 푼 때문에 하늘나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탈 뻔했다.
지금 생각하면 금전적으로 너무 힘들었었지만, 그때 몸에 배었던 검소한 소비생활이 지금도 간간이 가정의 금전적 위기에 처했을 때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남편이 한국에 돌아온 후로 안정적이지 않고 수입이 들쑥날쑥했는데, 그때의 자린고비 정신으로 수입이 거의 없을 때에도 큰 정신적 타격 없이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며 별 어려움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지금은 남편의 수입이 그때 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역시 돈 씀씀이는 많이 커지지 않았고, 목 돈이 들어왔을 때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고스란히 통장에 넣었다.
우리 부부의 돈 쓰는 방식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굉장히 놀라워하고 신기해한다.
아마도 100원을 아끼기 위해서 몇백 미터를 걷고, 식재료가 꽉 차 본 적이 없는 고시원 냉장고보다 더 작은 냉장고의 초라한 재료로 매일 저녁 요리를 해 낸 경험은 보통의 부부들은 겪을 일이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때의 냉장고보다 크기가 3배 이상 커졌고 금전적으로 훨씬 여유가 있지만 여전히 우리 집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