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눈 떠보니 유부녀, 나의 결혼기(3)
이 질문에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다. 일단 결혼에 대한 꿈도 생각도 별로 없었다.
영원히 이어질 나의 근사한 청춘에 대한 상상만 신나게 해 왔다. 일단 결혼이라는 것은, 특히나 여자의 결혼이라는 것은 우선 집안일을 가뿐히(?) 해 내야 하는 것이 주요 임무이다. 다 그렇진 않겠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 기대하는 여성의 역할은 보통 그렇다.
안타깝게도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일단 내가 자라온 환경을 보자.
나름 험난한 유년 시절을 겪으셨다던 울 엄마.
라는 신념이 있으셨다.
이런 엄마의 교육관 속에 자라온 난 실제로 창피한 말이지만 다 클 때까지 밥 먹을 때 물까지 엄마가 떠다 주셨고 내가 집안일을 하려고 하거나 부엌에라도 얼씬거리면, 엄마는 방해만 된다며 멀리 내 쫓으셨다.
주부로서의 집안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들고, 끝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일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처음 만들어보는 요리라던가 처음 해보는 집안일이 소꿉놀이같이 재밌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반복되는 청소, 빨래, 요리, 설거지, 기타 등등의 집안일은 더 이상 나에게 신선한 일들이 아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힘든 일들이 되었다.
변화를 추구하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했던 난 만날 친구도 없고 집안일 이외에 달리할 일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이 무척 따분하고 힘들었다. 남편이 돌아오는 시간만이 내 일상의 최고로 행복한 일이었으므로 매일 남편의 퇴근시간만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가끔 부부 싸움이라도 한 다음날에는 집안일은커녕 식음을 전폐하고 방바닥에 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신 상태에 이르게 되기도 했는데,
그렇게 한번 손 놓은 집안은 개판이 되고 밀린 집안일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더 손댈 수 없는 심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특단의 조치로, 주말마다 대청소를 하는 것을 남편에게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운명의 장난처럼 남편은 나처럼 '곱게 자란 아들'이었던 것이다!
아들만 둘인 집안의 장남으로서 엄청나게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큰 소리 한번 못 내시고 집안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일생을 전업주부로 몸 받쳐 살아오신 어머니 밑에서 남자는 철저히 바깥일, 여자는 철저히 집안일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고 세상의 이치라고 배우며 곱게 곱게 온실의 화초처럼 자랐다.
집안일이던 바깥일이던 남자들이 힘든 일을 도맡아 하는 여성인권상위인 우리 집과는 전혀 반대의 가정에서 자란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나의 주말 대청소에 대한 건의는 부부 싸움의 불씨가 되었고, 왜 남자가 평일에 회사에서 힘들게 일을 하는데 주말에 집안일까지 해야 하는지 도저히 1도 이해할 수 없다는 남편이, 주말에 집안일은 물론이고 가끔 요리까지 도맡아 하셨던 친정 아빠를 보고 자라온 나로서는 1도 이해할 수 없는 괘씸하고 속상한 일이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결혼을 택한 건데. 연애 기간이 짧은 탓도 있겠지만, 이렇게 서로 생각과 생활방식이 다를 수 있을까? 난 너무너무 좌절에 빠졌고, 남편 역시 나에 대한 실망감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내 입장에서는 결혼만 하면 공부도 시켜주고 나의 일을 지지해 주겠다던 남편이 하루 종일 집에 처박혀 집안일만 해야 하는 내 심경을 알아주지도 않고, 나도 처음인 집안일이 너무 힘들어서 좀 도와달라는 건데 펄쩍 뛰며 거부하는 남편이 너무 야속했다.
남편입장에서는 힘들게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 싱글 때처럼 온라인 게임이도 하면서 쉬고 싶은데 왜 자신이 그 시간까지 희생하며 집안일을 해야하는 지 억울했던 것이다.
그렇다. 부부가 된다는 것은 마냥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과 동시에 정말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며 서로의 다른 점을 평생에 걸쳐 맞춰가야 하는 힘든 여정을 함께 하는 것이다. 지금은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결혼 2개월 차 타향살이 신혼부부가 그 진리를 알았을 리가 없었다.
정말 많은 싸움과 화해가 오갔던 일본에서의 신혼생활.
지금도 신혼시절을 떠올리면 아름다운 추억보다 박 터지게 싸운 기억만 강하게 떠오른다.
부부 싸움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쓰자면,
그날은 한국식 만두가 먹고 싶어서 홀로 만두 속을 만들며 남편을 기다렸다. 퇴근한 남편에게 만두피를 만들어 같이 만두를 빚을 것을 제안했는데 칼같이 거절당했다. (우리 남편은 그런 사람이다. 만두피를 만드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효율성을 가장 따지는 이성적인 남자다.)
부부싸움 후 먼저 문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이 진다는 말이 있지만 너무 화가나서 난 처음으로 문을 박차고 집을 나갔다.
그 당시 신혼집은 나고야에서도 1시간 이상 떨어져 있는 안조시. 그 안조시에서도 더 한적한 곳으로 들어가야 하는 주로 노인들이 거주하는 시골(?)에 있었는데, 저녁 8시만 넘어도 마을의 불이 다 꺼지고 사람 보기가 힘든 동네로, 그날도 인적 없는 깜깜한 시골길을 질질 짜면서 정처 없이 걸었던 기억이 난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전화는 무조건 국제전화였기에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혼자 슬픔을 삼키다 마지못해 집으로 슬그머니 들어와야 했다.
친구도 없고 돈도 없고 직업도 없고 집안일은 힘들고 남편은 밉고. 아, 정말 힘들었다.
누가 외국에서 장기 거주 계획이 있다고 한다면, 마음 단단히 먹고 시작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심지어 그게 결혼 후 타지에서 하는 신혼생활이라면 더욱더 신중하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