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눈 떠보니 유부녀, 나의 결혼기(5)
일본에 있을 때 나중에 엄마가 된다면 목표로 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뜬금없지만 '영어를 잘하는 엄마'였다.
항상 영어에 대한 갈망이 있었지만 결국 영어를 정복하지 못 한 채 결혼을 했다.
아이가 생기면 더욱 공부할 시간이 없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영어를 잘하는 준비된 엄마로서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아이와 일상을 영어로 이야기한다면! 그런 아름답고 폼 나는 광경을 꿈꿨다.
남편이 출근하면 간단히 집안일을 끝내고 영어 공부로 하루를 시작했다.
하지만 영어는 일본어와 달리 깊이가 있는 언어였다. 기본 문법도 다 떼지 못한 내가 독학으로 하는 공부가 잘될리 없었다. 영어는 내가 넘기에 너무 큰 산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전문직 엄마'였다.
30대 초반이 다른 일을 도전해 보고 싶어 제일 안달이 난 나이라고 한다.
나도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일에 조금 질려있었기 때문에 방송이든 강사든 뭔가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때 한 푼이라도 살림에 보태보고자 일본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과외를 했었는데,
가르치는 일은 처음이었지만 꽤 적성에 맞았고 재밌다고 느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간 후에 어느 대학의 한국어 교육원에서 한국어 교육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과정을 마치고 보통은 대학원으로 바로 진학을 하는 코스였다.
나도 다른 학생들처럼 대학원에서 한국어 선생님 자격을 따고 싶었지만 금전적인 여건도 안 됐고 뱃속에 첫째도 생겨서 잠시 미루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 잠시가 10년이 넘게 걸릴 줄이야.
다행히 얼마 전 학점은행제로 대학원보다 적은 금액으로 더 빠르게 관련 학과의 학사학위와 한국어 교사 자격증 2급을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어교사는 일을 따내는 것도 힘들지만 돼도 멋진 전문직과는 거리가 있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웹툰 연재작가'였다.
일본에서의 신혼생활을 만화로 만들어서 N 포털사이트에 업로드를 했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괜찮았다. 그때만 해도 외국 라이프의 만화가 나름 신선한 소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만화를 본 남편의 반응이었다.
'흠, 이거 하나도 재미없는데? 이런 걸 누가 봐?'라는 충격적인 피드백에 나의 만화는 4편 만에 막을 내렸다.
웹툰 한 편을 완성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 조차도 내 만화가 재밌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데 유일하게 옆에서 응원해 줄 한 사람이 그런 식의 말을 하니, 난 더 이상 그릴 의욕을 상실해 버렸다.
역시 친구든 연인이든 가까이에 긍정적인 사람을 둬야 잘된다고 하더니만. 내가 아직까지 이러고 있는 것은 혹시 남편 때문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그렇지만 사실은 내가 좀 더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내 신념대로 꿋꿋이 그렸겠지.
난 그냥 작은 말에도 상처받는 보통 사람이었다.
결론은 '뭔가 멋지고 그 멋짐이 안정된 상태가 아니면 절대 애를 낳지 않겠다!'
그 결심을 이루기 위해 항상 수첩에 미래에 대한 계획을 적고 틈나는 대로 읽고 머리에 되새기곤 했다.
이렇게 멋진 엄마에 집착했던 이유는 나에게 전업주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업으로 살림만 하고 애만 키우다가 그냥 평범한 아줌마가 되어버린다면 정말 서글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난 멋진 엄마는 되어도 아줌마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결혼 조건(?)이기도 했던 도쿄에 있는 대학원 진학은 결혼 후 급작스럽게 어려워진 일본 경제의 여파로 도쿄로의 전근이 무기한 연기가 된 데다 계속된 경기 불황으로 결국 남편의 회사는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희망퇴직을 받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많은 한국인들이 월급의 몇 배를 받고 퇴직을 했고, 우리도 한국행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월세가 반값인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60년 된 임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생활비도 더 아끼며 어떻게든 버티어 보려고 했지만, 더 큰 문제는 나였다.
그때 나에겐 말 한마디 나눌 동네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사람 좋아하는 내가 마주치는 사람이라고는 슈퍼 가는 길에 마주치는 아파트 단지 안을 뛰어노는 브라질 아이들과 그 엄마들뿐이었다.
내가 애라도 있었으면 어떻게든 어울려 보았을 것을... 난 그때 몸은 유부녀였지만 정신은 싱글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인 친구들이 있었지만 너무 멀리 살았고 다들 직장에 다니는 싱글 동생들뿐이어서 자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일본어로 일상 대화를 나눌 수는 있었지만 깊은 속 이야기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늘 외로웠고 한국이 그리웠다. 우울증까지 겹쳐서 이대로라면 정신이 어떻게 되겠다 싶었다.
결국 우리는 여러가지를 고려한 끝에 한국행을 결정했다.
한국에 왔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던 돈은 천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새 삶을 시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고 남편은 당장 일자리도 구해야 했다. 내 진로를 생각하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먼저였고 당장 먹고사는 것이 시급했다.
그러던 중 뱃속에 아이가 생겼고 일단은 이 아이를 잘 낳아서 키우는 것이 내 삶의 목표가 되었다.
일본에서의 삶이 꿈이었다면 한국의 삶은 현실이었다.
그때는 아이를 낳고서 금방 진로를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난 여전히 방황 중이다.
내 꿈을 지켜주겠다던 남편은 현실의 냉혹함 속에 10년 넘게 우리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내 꿈에는 관심도 없고 본인 일만 열나게 하고 있다. 나 역시 나의 본분인 육아와 살림을 10년 넘게 열나게 하는 중이다.
역시 현실은 처절하고 전혀 아름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