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쓸 키보드를 샀다. 입사하고 거북목 예방을 위해 다들 사는 사무용품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 의미있는 소비였다. 인턴생활을 할 때는 텅 빈 책상에 노트북만 덜렁 놓고 생활했었다. 어차피 떠날 자리라는 생각에 내 짐 두고 다니기가 부담스러웠다. 짐이 많으면 떠나는 날에 힘든 건 결국 나였다. 공식적인 '내 자리'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이제 노마드족 생활을 청산하고 한동안은 오래 머물 자리가 생겼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내 자리'인 것이다. '내 자리'를 위해 처음 산 사무용품이 키보드다.
어떤 키보드를 살 지 결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집에서도 꽤 고가의 키보드를 쓰고 있는 터라 그걸 사무실에 둘까 고민하다, 타건 소리가 꽤 커서 새로 사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여럿이 쓰는 공간에서는 너무 시끄러운 키보드는 민폐가 될 것 같다. 전화와 대화가 주 업무인 AE들이 있는 층이라 소음에 관대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신경쓰이고 싶지 않아 저소음 키보드를 선택했다. 막상 사무실에 앉아서 소리에 귀 기울여보니 PC방 뺨치는 키보드 소리들이 들려 괜한 걱정을 한 것 같긴 했지만.
청축, 갈축, 적축, 흑축, 은축 …. 수많은 종류의 스위치 축 중에서 흑축을 선택했다. 이미 가지고 있던 키보드는 키감이 가벼운 편이라 더 묵직하고 서걱거리는 키감을 원했다. 내가 무거운 키감을 선호한다고 하자 선배님이 걱정하셨다. 일을 하다보면 관절이 안 좋아져서 손에 무리가 갈 수 있다고. 속기사들이 쓰는 세벌식 키보드를 쓰는 선배님을 보자 내 미래가 될까봐 조금 두렵기도 했다. 키감과 건강 사이, 무거운 흑축과 가벼운 적축 사이를 고민하다가 결국 묵직한 흑축을 선택했다. 아직은 손목 짱짱한 20대인데 지금 안 쓰면 언제 써보겠어? 라는 마음으로.
집에서는 탁자가 좁아서 공간활용을 위해 텐키리스 키보드를 사용했었는데 회사용 키보드는 텐키가 있는 키보드를 샀다. AE들이 생각보다 숫자 계산할 일이 정말 많더라. 견적, 정산, 경비 …. 숫자가 싫어 문과에 왔는데 일을 잘하는 AE가 되기 위해서는 숫자와 친해져야 한다는 숙명을 받아들였다. 제작 부문 동기들의 책상에는 컴팩트한 텐키리스 키보드가 있는 걸 보면서 내가 선택한 업의 속성이 참 와닿았다. 어떤 일을 하냐에 따라 책상의 모습도 참 다른 것 같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엄선해 고른 키보드를 빈 책상에 올려두었다. 키보드 하나만 뒀을 뿐인데 책상이 꽉 찬 것처럼 든든해졌다. 포장을 풀어 처음 눌러보는데 정말 조용하고 묵직했다. 예상보다 더 힘껏 눌러야 해서 살짝 당황스러웠다. 타이핑을 오래 하다보면 손 끝에 단단한 힘이 생길 것 같았다. 무게감이 단순히 키압이 무거운 흑축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 하다.
앞으로 몇천, 몇만번이고 매일매일 누르게 될 이 키보드. 내가 어떤 스토리를 써내려갈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호기심과 두려움의 무게를 단단히 견딜 수 있는 손끝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결국 시간이겠지. 무거운 키보드도 가볍게 두드리고 있을 근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