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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권 May 27. 2020

대학원생도 가슴이 일렁이는 봄이 있나요?

생각보다 가슴이 일렁이는 일이 많습니다. 학부생의 봄과는 비교가 안되죠.



"선생님께서 일단 대학교에 들어가면

4-5월에는 벚꽃과 함께 가슴 두근거리는 시기를 보낸다고해서 고3 시기를 버텼는데...

정말인가요??"

-2020학번 새내기

 



    일단 내 대학생활에 대한 관찰과 경험에 비추어 답부터 하자면, 사실이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볼 수 없었지만, 봄의 캠퍼스는 진풍경이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며 식물의 번식 활동을 하는 기간에 학생들도 동참하여 동물의 왕국을 만든다. 꽃가루에 연애세포 성장 촉진제라도 들어있는지, 모두에게 숨기지만 모두가 아는 썸타는 밀당, 내 취향의 사람에게 번호를 물어보고, 얼떨결에 내 취향이 아닌 사람들에게 내 번호가 넘어가는 활동들이 피크를 찍는다.


     결국 중간고사 직전 쯤에는 갑자기 CC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해서 '우리 사귀어요~'라고 광고하듯 손잡고 도서관과 카페를 다니며, 이 구애의 열기는 멘붕의 벼락치기, 과제 폭탄 시기가 다가와야 소강 상태에 빠져든다. 즉, 이 시기에 사랑에 빠진 자들은 설레서 두근거리고, 사랑의 짝대기가 이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조바심에, 혹은 '될놈은 된다'라는 진리에, 혹은 '안생겨요'라는 놀림에 부정적인 감정으로 두근거리게 되는 것이다.

 

    자, 이건 보통 우리가 말하는 대학교의 학부생들의 캠퍼스 로망. "그럼 대학원생들도 봄에는 감정이 일렁여서 잠 못이루는 시기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이 또한 답은 사실이다. 감정이라곤 없어진 것 같던 회색빛의 대학원생에게도 이 시기에는 다채로운 감정의 파도가 일렁인다. 그것도 학부생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내가 이렇게 새로운 감정까지 이런 깊이로 느끼는 사람이라니.


    일단 조교라면 학부생들의 과제를 채점하고, 중간고사 준비에 도움을 드리거나 시험 채점해야하는게 기본이다. 학부생들은 입학하자마자 3월은 열심히 놀았기 때문에, 이때가 되어서야 과제에 관한 문의나 수업 관련 연락을 보내오기 시작한다. 병아리 같이 파릇파릇한 새내기가 조교 자리로 직접 찾아오기도 하고 이메일로도 보내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제가 다음주 발표인데 팀원들이 연락이 없어서요. 혹시 연락처를 받을 수 있을까요ㅠㅠ?'

> 앗... 개인정보이니 일단 학교 홈페이지 쪽지나 이메일로 연락해보시고 그때도 연락처를 못받으시면 알려주세요! (화이팅ㅠㅠ 병아리 같은 학부생들 울지말렴.)


- 조교님... 갑자기 저희 집에서 오래 함께한 가족인 강아지가 아파서 급하게 집에 내려가느라 이번 수업을 못갈 것 같은데요. 과제 제출은 다음 수업 때 제출 드려도 괜찮을까요?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내려와서 정신이 없네요. 이렇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ㅠㅠ

> 그러셨군요ㅠㅠ 저도 강아지가 있어서 이해합니다. 빨리 낫길 바라겠습니다ㅜㅜ 일단 교수님께 말씀 전달드리겠습니다.

(교수님께 마치 나의 일인 것 처럼 말씀을 드렸다. 이후에도 수업에 안나오길래 솔직히 좀 걱정도 했다. 나중에 학부인턴한테 들으니 그 친구는 그 길로 잠수타고 반수해서 다른 대학교에 갔다고.)


- 'ㅁㅁ번째 과제에의 ㅇㅇ 문제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풀었는데 왜 감점 되었나요?'

> 아 네. ㅇㅇ건물 ㅇㅇ호 제 자리에 해당 과제 들고오시면 과제 보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내적한숨ㅜㅜ 채점 기준 컴플레인 걸기 시작하면 머리 아픔. 내가 채점 기준을 딱 세우는 경우도 있고, 교수님이 채점기준을 확실하게 정해주는 경우도 있는데, 두 기준 다 학생에게 납득시키려면 생각보다 없어지는 시간도 늘고 스트레스도 받는다.)


    기대했다면 미안하다. 조교와 새내기의 로맨스는 한번도 못봤다. 전설처럼 소문만 들릴뿐. 아무튼 이렇게 조교가 학부생 케어와 수업의 의무에 시간과 마음을 주다보면 슬슬 본인의 연구가 밀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많은 연구실들은 일정 주기마다 정기적인 연구 미팅이 있다. 그리고 교수님은 내 연구가 밀리는 것을 귀신같이 아신다.


     뭔가 '아.. 내 연구 밀리고 있는데' 싶은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리면, 어느날 교수님께서 미팅 끝에 '그래 요즘 조교하느라 정신없지? 수고가 많네. 요즘 내가 학부생 일로 연구 지도를 잘 못해준 것 같은데 밀린 연구 진척 상황은 다음 미팅 발표에서 얘기해보지.'라는 말씀을 해주시는 것이다.


     안 들었다면 이런 말을 언제 어디서 들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자다가도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눈을 감아도 얼굴이 보이고, 에미넴의 랩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목소리가 들리며, 그 사람 생각에 잠못이루고 뒤척인다. '아... (교수님께) 무슨 말을 해야할까... 내가 이렇게 잠 못 이루고 연구 고민으로 뒤척이며 지새우는 밤들을 그분은 알아주실까...'


    그럼 조교를 안하는 고년차가 되면 마음의 일렁임이 잠잠해질까? 고년차가 되면 학부생과 수업은 마음에 일렁임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5월은 바야흐로 사랑과 감사의 달. 노동절, 어린이날, 어버이날, 기본 세팅에, '랩장()'정도의 위치가 되어 스승의날 이벤트와 분위기를 주도해야한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가야만 하는 결혼식들이 추가.


    일단 노동절. 대부분의 대학원생은 4대보험이 되지 않는 인구다. 게다가 대부분의 학교는 노동절에 상관없이 수업을 하므로 보호 받는 노동자도 아닌 대학원생들은 연구실에 나간다. 단톡방에서는 이제 거의 다 취업한 직장인 친구들이 오랜만에 보자며 약속을 잡는 스케줄이 공지로 떠있다. 연구실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가정의 날들을 계기로 가족이 모이게 되는 날이 다가오면 친구들이 올리는 조카 선물, 부모님 용돈 케이크 사진에 인스타가 도배된다. 다 떠나서 일단 어버이날이라고 해서 내 실험과 연구실 스케줄이 시간 맞춰 끝나는 것도 아니다. 운이 좋아 연구실을 일찍 나와 인사드리러 가도 '우리 ㅇㅇ 많이 힘들지~? 그래도 하나뿐인 20대인데 청춘사업도 하고 연구한다고 밤새고 너무 몸 상하지 말아라'라는 말은 오히려 '언제 졸업하냐'는 말보다 죄송하다. 엄마, 아빠, 저 연구 잘 하고 학위 따서 꼭 부끄럽지 않은 자녀가 될게요.


     결혼식. 다른 사람과 서로의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선서를 하는 친구가 새삼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결혼을 준비하는 다른 친구들은 결혼식을 보며 본인들이 준비한, 본인들이 들였던 결혼 비용과 자금에 대해서 공감대를 주고받는다.

     친한 친구의 결혼식이라면, 정말 나는 그 누구보다 축하해주고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물건을 선물 주고 싶은데, 친구가 내게 되어준 힘과 내가 줄 수 있는 축하가 비교가 된다. 내가 졸업 논문을 쓰면, 연구가 좋은 저널에 퍼블리시 되면 꼭 친구에게 소식을 전하고 고마웠다고 인사를 해야겠다. 졸업하고 취업해서 첫 월급 받으면 이 친구 신혼집에 잘어울리는 크고 아름다운 선물을 사야지.


     5월의 햇살처럼 좋은 날에 좋은 사람들 속에서, 대학원생의 마음은 마냥 좋지만은 않다.

나도 예전에는 1년 중에 5월을 가장 좋아했었는데.


    덧붙여, 조교도 안하고 본인은 본인 생활에 스트레스가 없어도, 본인이나 무서운 연구실 고참이 가을 학기 졸업 대상자라서 졸업논문심사를 준비하는 시기일 수도 있다. 혹은 선배들이 위의 사항들에 의해 저기압이라면... 본인 의 자유의지와 상관 없이 자꾸 특정 사람의 눈을 못마주치게 되고 자신의 이름이 불릴때마다 두근거릴 수도.


결국, 봄은 내게 새내기 시기때나 대학원생 시기 때나 잊고 있던 감정의 일렁임을 줬다. 대학원생이 되어 느끼는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학부 때 느꼈던 그 어떤 감정보다 그 파도의 크기는 훨씬 크고 자주 있다.


[덧+]  '대학원을 가서 연구에 몰입하다가 너무 재밌어서 인간적인 감정, 사회적 감정을 못느끼는 "연구 로봇"이 되는건 아닌가! 난 쉘든이 되긴 싫은데!'라며 살짝 걱정했던 내 예전 일기의 진로 고민이 깨알 웃음포인트. 혹시나 이런 걱정에 대학원 진학을 고민한다면 빅뱅이론의 쉘든은 드라마 속의 인물일 뿐임을 생각하자. 과거의 내 자신을 무려 CalTech의 잘나가는 이론물리 연구자랑 비교하다니



☆이 시기의 대학원생을 대하는 리빙 포인트☆

- 주변에 5월에 대학원생이 보인다면 맛있는 것을 사주자!

돈이 없는 시기이지만, 6월에 환급된 세금에 여유가 생기면 바로 생각 날 사람은 5월의 나를 다독여준 사람.

내가 대학원생이라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라구요. 흑흑. *conflict of interest*


- 대학원생을 오랜만에 만난다면, '하고 싶은 공부만 하는 대학원생이 부럽다'는 말이 목 끝까지 나와도 한번쯤 삼켜주자.

연구가 잘되고 못되고, 좋은 연구실에서 전액장학금을 받고 다니느냐 마냐와 별개로, 위와 같은 그늘은 어디가서 얘기하기도 어렵다. 이런 사소한 고민은 아무도 얘기 안하고 그저 미소지어 넘기니까 직장인들이 학업의 꿈만 품고 대학원생이 될 지도...


이 시기에 내게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

- SNS를 멀리한다. 특히, 인스타그램.

SNS는 일반인에게도 시간낭비서비스의 다른 말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 시기에는 더더욱 멀리하자.

비교는 마음속 괴물을 키운다.


- 힘들 때면 고개를 들어 6월에 들어올 기타소득세의 환급을 생각하자!

그리고 곁에서 다독여주는 사람들을, 이런 내 상황에도 나를 잊지 않고 따뜻함을 주는 사람들에게 마음이라도 더 챙기고 안부라도 한번 더 물으며 감사를 표하자.




수요일은 분명 '가벼운 질문을 다뤄야지!'했는데. 쓰다보니 사소한 질문에 답이 무거워졌네요 ㅜㅜ


다음번 수요일 글은 대학원 생활 꿀팁 이라던가

읽고 '앗! 이건 진짜 꿀팁이잖아? 써먹어봐야지'

싶은 기분 좋아지는 것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일요일 11시에도 새 글은 업데이트 됩니다.


대학원생도  매거진도 지켜봐 주는 이의 관심과 사랑(♡버튼, 댓글, 작가 구독) 먹고 자라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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