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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권 May 31. 2020

대학원에 오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사소한 무게들

그래요. 힘든거 알고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이라는 곳이 그렇게 힘들다는데...

뭐가 그렇게 힘든가요?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학을 결심하셨나요?

라고 학부생 인턴이 물었다.




물론 각오 하고 들어왔다.

사실은, 다 힘든거 어느 정도 힘든지 알고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 가까운 주변 사람들이 박사 과정을 밟았거나, 밟는과정이거나, 박사과정을 염두에 두고 석사 과정까지는 밟았으니까.


얼마나 워라밸이 없는지, 얼마나 연구비 과제 따는 것에 치이는지,

혹은 얼마나 끊임 없이 하고 또 하는 생활의 반복이 무엇인지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뭐가 힘든건지 안다고.


그래서 대학원 진학 면담마다 교수님들께서

'학문의 길은 정말(정말,정말,정말,...) 험난한 것이다. 얼마나 힘든 것을 알고 있는지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라.'

라고 하실때, 나는 온 진심을 다해서 '잘 안다'고, '그 모든 힘든 것을 나는 버텨낼 자신이 있다'고 답했다.


근데 직접 몸을 담고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사소한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이 사소한 것들이,

다른 그 중대한 무엇보다도 나를 한숨 쉬게하고 마음을 무겁게할 때가 있다.


그래서 적어본다.



지금 당장 이 과정을 밟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수 있는 사소한 무거움들.

교수님이 학생에게 해주는 조언이기엔 너무 시간이 지나버렸을 작은 감정의 물결들.




- 4대 보험이 없다는 것

보험자격 득실 확인서를 떼면 나는 아직도 부모님의 피보험인으로 되어있는데 그게 부끄럽다. 독립적인 경제주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아직도 피부양자로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 부모님께 첫 월급 용돈꽃박스, 용돈 등을 드릴 수 없다는 것

그래. 비교하면 괴물이 생길수밖에 없다지만.

부모님께 드리는 선물들, 용돈들, 친구들이 돈 벌어서 부모님들 모시고 가는 여행을 보면 부럽고 죄송하다.



- 부모님께서 결혼 언제 하냐고(가족 계획이 어떻게 되냐고) 도와주시고 싶은 마음에 여쭤보시면, 그저 웃을 수 밖에 없다는 것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하고 서로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결혼...언제쯤 돈을 모을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가정이란것을 꾸릴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내게 연구 외에 여분으로 있을까?



-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받는 것 만큼 내가 돌려주지 못한다는 것

나는 참 복에 겨워서 주변 사람들이 정말 자기일 처럼 나를 챙겨준다.

그들이 그들의 고민, 시간, 걱정, 돈을 들여가면서 나를 도와주고 아껴주기에 지금의 내가 버틸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내가 그들에게 받는 것 만큼,

그리고 더 마음 아프게도 내가 그들에게 정말 주고 싶은 나의 큰 마음을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더 좋은 것을 주고 싶고,

더 시간을 들여서 그들과 함께하고 싶고

그들에게 힘이되는 조언을 주거나

그들의 생활에 공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나의 생활은 그들의 생활과 꽤나 동떨어져있고, 소득도 적으며, 시간 조차 쫓긴다.


그게 서러울 때가 있다. 내가 그들에게 정서적인 힘조차 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야 기운내'라고 하면서 정말 내 일처럼 온 마음을 다 해서 그들에게 밥 한끼도,

술 한번도 못사주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이런 사소한 정서를 조절하기에 가장 힘든 것은, 아마도 이건 교수님도 의미하신 것이겠지만,

이러한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 지 아무도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박사라는 과정은 많은 석사과정과 달리 '끝'이라는 시점이 존재하지 않고,

박사 이후에도 연구직을 지원한다면 비정규직일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까지는 대학원에 직접 몸을 담는 학생일때 더 와닿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학생들은 추가로: 밤샘이 많은 연구실 근처에서 자취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인건비 문제, 랩 내 분위기 문제, 졸업 문제 등을 고민한다. 이는 뉴스든, 주변 대학원생이든 이 글이 아니더라도 많이 들려오는 문제이으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다.)



중요하고 누구나 이 문제는 무거울만하다고 인정 하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아마도 교수님들께서 학생들에게 강조했던 학문의 길 위에서 힘든 부분은 이런 부분이었으리라.


- 내가 정말 이 분야에서 '중요한'(주관적으로, 객관적으로) 업적을 남길 수 있을까

학계에서는 늘 어디선가는 빛의 속도로 성장하는 사람들 이야기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다.

결국 모두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것이므로. 내가 속한 것은 사실 아무런 보장을 해주지 않으므로.

정말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렸고, 내 책임이고,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다.


Quora에서 누가 박사 과정이 왜 힘드냐고 물은 질문에 누군가 답변을 이렇게 달았다.

'You're basically no one before ~'.

그렇다. ~의 자리에는 그냥 '박사 학위'가 아니라, 내 이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같이 연구하고 싶은 사람, 나의 연구가 기다려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면 소용 없다. 더 나아가, 학문에 들어온 본인의 개인적인 이유가 학계의 진보를 위해서 였다면... 내가 지금 하는 연구, 내가 지금까지 이뤄온 추세로 봤을 때 나는 얼마나 중요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까? 나는 똑똑하다는 박사들 사이에서도 빛을 발하는 낭중지추가 될 수 있을까?



- 내가 이 모든 실패 과정의 무한 루프를 견딜 수 있을 만큼 좋아하는지에 대한 회의

과학과 학문은 당연하지 않은 결과를,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를 증명해 낼 때 가치가 올라간다.

이 말인 즉슨, 이런 '새로운' 결과가 정말 맞다고 증명하기까지에 무수히 많은 실패와 증명 과정이 지리하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실험이 꽝이 되는 것은 기본값이고 설령 잘 나왔다고 해도 증명하고 또 증명해야한다. 내 가설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완벽할지언정, 더러운(noise 가 많은) 진짜 데이터가 틀리다고 하면 나의 모든 노력과 시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때 '괜찮아. 다시 해보자. 될 때까지.'라고 정말 할 수 있을까?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이 있고, 실험에 들어간 액수라는 부담이 있는데 괜찮을지 상상해보자. 늘 현실은 상상보다 훨씬 더 가혹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면서.



- 정말 나는 이걸 전공으로 박사 과정 진학을 했을 때, 추후에 후회하지 않을만한 직업 안정성을 얻을 수 있을까...?

계산 해보자. 1년에 나오는 박사 졸업생이 전 세계에 몇명이며, 1년에 공지되는 교수자리/정규직 연구원 자리는 몇자리인지.

대학원에 몇년 있다보면, 본인이 속한 곳이나 연구하는 분, 혹은 저 멀리 들려오는 NCS급 논문 쓴 박사님들도 정규직 아닌 분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바로 산업군으로 지망해도 언제든지 회사에서 환영하는 분야가 아니라면, 본인이 이런 불확정성이 높은 상황에서 어떻게 생계를 이어갈 지, 가족 계획이 있다면 가족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고민할 수 밖에 없다. 몇년 뒤에 친구들은 몇천만원, 억을 모아서 집을 살 때 내가 설령 비정규직 연구원이더라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NCS = Nature, Cell, Science



- 내가 지금 하는 연구가 정말 순수한 지적 호기심 충족 외에 세상에 어떤 가치를 창출하는가?

어느 정도의 큰 세금이 들어가서 진행되는 내 연구로 인해 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돕고 있는가?

쥐나 동물의 생명을 다루는 과학을 논외로 하고 '세금'이라는 가치만 놓고 보더라도, 과학은 세상의 다른 부분에서도 필요로 하는 자원이 많이 소요되는 학문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디폴트 값이 꽝이 대부분인 실험과학이라면, 나는 내가 연구를 함으로서 발생하는 무수한 실패의 과정에서도 세금을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내야만 한다. 과제비를 위해서도, 그리고 내 자신의 프로페셔널리즘 직업관을 위해서도. 근데... 이렇게 통제되고 또 통제된 내 실험이 정말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를 창출하고 있을까? 내 연구가 세금 낭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 자신에게, 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 얼마나 납득 시킬 수 있는가?



- 일단 졸업하기 위해서, 실적내기 위해서, 과제 따기 위해서 연구를 하는데, 이 연구가 내가 하고 싶은 연구가 아니면?

이건 실험 과학하시는 교수님들이라면 은퇴까지도 고민하시는 문제라고 들었다. 연구는 학생들이 있어야 실험을 할 수 있고, 학생들을 데리고 있으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따려면 연구비를 딸 수 있는 연구를 해야하고... 그럼 결국, 내가 학문을 하는 이유가 '내가 정말 궁금한 바로 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이때 연구 주제간 괴리가 발생해도 괜찮을지?




음 글이 한숨으로 가득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힘,

포기할 수 없게 하는 힘은 다음에 적겠다.




밤 11시에 올리기에는 마음이 조급할까 하여... 오늘은 일찍 연재를 하였습니다.

오늘 글은 길고, 많이 무거웠네요.


주변에 대학원에 관심이 있는데 고민하는 분이 계시다면, 어떠한 고민들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을 지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는 글이 되길 바라고 작성했습니다.


매주 일요일에는 어디가서 물어보기 어려운, 혹은 터놓고 말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수요일에는 조금 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주제들을 다루려 합니다.

제 개인적인 에세이 일수도 있고, 꿀팁이나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준비해볼게요!


그럼 지난 한 주도 수고 많으셨고,

오는 한주도 평안한 마음으로 맞이하실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좋은 주말의 마무리, 5월의 마무리 되시길!


대학원생도 이 매거진도 지켜봐 주는 이의 관심과 사랑(♡버튼, 공유, 작가 구독, 매거진 구독, 댓글)을 먹고 자라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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