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저는 재수하고 대학교에 입학해서... 제 나름의 억울한(?) 심정에 실컷 하고 싶은 것은 전부 다했습니다.
동아리도 끝까지(?) 가보고, 대회도 나가보고, 토론 교육 봉사활동도 다녀보고,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교환학생 나가서도 해당 해외 학교 대표로 토론 대회 나가보고 (ㅋㅋㅋㅋ 토론에 미쳤던 것 같군요ㅋㅋㅋ), 복수 전공도 경영학을 했다가 때려치우고 심리학도 해보고... 전공 관련 모임('학회'), 연구 발표 학회(conference), 스터디, 듣고 싶은 수업, 학점, 여행, 과외, 알바 뭐 하나 별로 아쉬운 건 없습니다. (정정: 기업 인턴 3개월 이상 해보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쉽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거의 다 해봤고, 설령 그게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찍어먹어 봐야 아냐'라고 말할 법한 일이었어도,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친 듯이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이상한 인연도 엮인 적 있지만... 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은 딱히 없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누군가,
너, 뭐할지 몰라서 대학원으로 결정을 유예한 건 아니야?
라고 묻는다면, 확신을 담아서 '아니'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한 가장 큰 이유가 커리어를 고민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대학교에 다니면서 제 삶에서는 '일'이라는 것이 제게 거의 가장 중요한 것은 더욱더 분명해졌습니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 할수록, 남자이든 여자이든, 저의 독립된 업보다도 제 반려자/가족을 서포트하는 것이 우선되는 삶을 산다는 건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저는 가정보다는 일에서 더 행복을 찾을 것 같은, 혹은 가정이 있더라도 꼭 일이 있어야만 행복할 것 같은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가능한 (모든) 커리어들을 A-Z까지 놓고 고민해봤고, 제게 중요한 커리어의 조건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였습니다.
자율성
제게 자율성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리고 이 자율성은 일(문화)의 자율성뿐만 아니라 업무 장소 선택의 자율성 또한 포함합니다.
우선 저는 제 자신도 잘 몰랐지만 위계질서에 취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위에 계신 분들이 신입생들에게 (참여 의사를 전혀 묻지 않거나 업무와 완전히 무관한) '장기 자랑해!'라고 하면 몸서리쳐지게 괴롭더군요... 특히, '어디 후배가 선배에게~'라는 말이나, '너 같이 저 연차의 사람이 뭐가 알아... 모르면 그냥 선배 말을 따라...'라고 한다면 저는 지금 글을 작성하는 이 순간에도 머리가 아픕니다. 더 나아가, 저는 해외에서 커리어를 쌓고, 삶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영어를 사용하고, 제가 할 수만 있다면 제가 일하는 공간을 한국만이 아닌 나라에서 선택할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학계가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전문성
일이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자, 죽을 때까지 놓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저는 제가 일을 하며 얻는 실력이 쌓이길 바랐습니다. 실력을 쌓는 일을 해야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그래야 오래오래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는 죽을 때까지 계속 공부하고 경쟁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적어놓고 나니 사실 학계가 아닌 모든 직업들도 마찬가지라 학계에서만 적용되는 속성은 아닌 것 같네요...
경제적 독립성
최소한 제가 타인에게 금전적으로 손 벌릴 위험은 없는 일을 하길 바랐습니다. 저는 제가 만약 전업 작가를 선택한다면, 제 자신이 이 경제적 독립성을, 최저 생계선을, 혹은 그에 대한 불안감을 건강하게 이겨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는 글을 사랑하지만, 전업작가로 뛰어들어본 경험도 없는 일이고, 세상에는 너무나 저보다 훌륭하고 제가 존경하는 작가님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영문과/심리학과 전공을 살린 통역이나 번역의 일도 제가 이를 통해 저의 경제적 독립성을 마련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전문성이라는 측면에서 상위 xx%에 꼭 들지 않아도 시장에서 수요가 많은 일(=여차하면 회사에 고용이 될 수 있는 기술을 갖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추가로 저는 저의 업이 다음과 같은 요소를 갖춘다면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요소가 있으면 좋은 추가 옵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장소로 만드는데 기여가 되는 일을 한다는 것
- 오래 남는 나의 일/작품을 남긴다는 것
- 늘 궁금해하고, 나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이렇게 기준을 세우고 나니, 저의 눈길이 가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법조계, PD, (경영 전략) 컨설턴트, (과학) 기자, 학계가 남는 것 같아 보였고* 다음 스텝은 이 직업이 실제로 경험했을 때 힘든 일이 무엇인지, 내 환상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알아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 분야에 몸 담고 있는 선배님들, 교수님들을 뵙고 질문을 하고, 결국 추려진 것이 학계였네요...
* 제가 알아본 옵션은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위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춘 다른 직업도 많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 교육자, NGO, 외교관, 개발자, 상담가, 예술가, 좋은 기업의 일원, 창업 등 다른 직업도 무수히 많으나, 제 전공과 제 가정환경, 제 적성 상 준비가 가능한 직업으로 추린 것이 위와 같다는 것입니다.
제가 저 개인적으로 인턴이나 대외활동, 혹은 간접 경험을 통해서 접해보았을 때 가장 저의 적성에 맞는 길이 대학원이었어서 왔으니...
한 줄 요약:
'진리 추구'라는 추상적인 가치보다는 제 개인의 적성 찾다 보니 왔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휴가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
휴가 간 사이에 구독자 분들이 더 생겨서 더 행복했습니다.
세이브 분도 만들어두고 있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음 글은, 대학원이 아니면 상상하기 어려울 장점들 (추상적 가치편)을 연재해볼 계획입니다.
지난번에 제 개인적으로 대학원이라 행복한 점들을 적은 것에 이어서 읽어주시면 흥미롭지 않을까 하는 소망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