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자란한뼘 Aug 12. 2024

정신건강의학과 문턱을 밟다.

그냥 조금은 이상하지만, 혼자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심리적 문제를 느끼고 심리상담을 경험하고, 또 회복하는 시간을 잠시 보낸 뒤 다시 찾아온 마음의 재난에 나는 결국 정신건강의학과를 가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벌써 1년 8개월 전의 일이다. 정신건강의학과를 간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꽤나 큰 부담이 되었다. 심리상담에서는 단순히 내가 현재 불안하고 불안정한 상태를 인정함에 그쳤다면, 이제는 정말 나의 어려움이 질병으로 분류가 되어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심리상담 때도 간간히 상담 선생님께서 "필요하다면 병원에 가서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이제는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고 좋아졌기 때문에 큰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거기까지 결심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야겠다 결심했던 것은 정말 마음 상태가 위험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정적인 성향에 주기적으로 밀려드는 적당한 우울함을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웬만한 수준에서 오는 우울함과 무기력함은 이미 진절머리 나게 겪어봤음에 크게 신경 쓰는 편도 아니었다. 그러려니 하는 것이었다. 지나갔으니 다시 오는 것이고, 다시 왔으니 이제 지나갈 그런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 간다고 느꼈다. 여기서 다시는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은 느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두운 수렁이었고, 한 치 앞을 헤아리기 어려운 짙은 안개였고, 발버둥 칠수록 빠져드는 늪과도 같았다. 보통은 적당히 괴로워하고 힘들어할 때쯤 바닥을 치는 듯한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럼 이제 이번 우울의 파도도 물러날 때가 되었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은 정말 달랐다.


단단히 믿어왔던 사람의 배신과 곧 고된 업무들이 끝날 수 있을 거란 사실이 무너진 것에 오는 실망감. 마침 밀려오던 우울의 파도. 당장 다가오는 내일과 다음 주, 다음 달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간 용케도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것만, 이제 한 짐 덜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것만, 이제 정말 물러날 곳이 없이 막다른 절벽 끝에 내몰렸다 생각하니 어지러워졌다. 분노가 솟구치다 낙담으로, 낙담이 깊어지다 참담함으로, 참담함이 퍼지다 이내 우울함이 몰려들었다. 여러 감정이 올라오다가도 한 감정씩 표면에 뚜렷하게 드러나고, 이내 또 다른 감정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를 반복하였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한 구석이 뜨거워지다가도 콕콕 찌르는 듯이 아파오기도 하였다. 아, 고장이 나버렸다.


그렇게 병원을 처음 가기로 결심하였다. 당연히 주변에다가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직 말을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좀 나아지고, 마음이 괜찮아지면, 그때가 오면 지나간 옛이야기처럼 넌지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주변에 병원을 검색해 봤다. 생각보다 병원이 많은 점에 놀랐다. 신중해야 했다. 나는 뭔가를 한 번 선택하면 쉽게 잘 바꾸지 않는다. 그만큼 처음 선택할 때 많은 고민을 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내 선택에 애착을 좀 많이 갖는 편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번에도 병원을 고르게 되면, 큰 문제가 있지 않는 한 쉽게 바꿀 생각자체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중해야 했다. 몇 군데 병원을 후보로 정하고, 여러 가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후기도 꼼꼼히 읽어보고, 위치도 살펴보고, 주차장도 중요하고, 운영시간도 꼭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해당 병원의 소개글을 읽어보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나름의 운영 철학과 치료 철학을 이해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한 곳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여기까지도 며칠이 소요되었다. 병원을 고르는 것도 힘들었지만, 정말 가야 할 것인가를 다시 고민하는데도 시간을 적잖이 잡아먹었다. 며칠을 고민하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나아질 기색 없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기에 이젠 정말 결정해야 했고, 행동해야만 했다.


금요일이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인 3시에 퇴근하였다. 가보려고 한 병원의 운영시간이 6시까지였기에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30여 분간 운전 후 병원 건물에 도착하여 진료 대기실 문을 여는 순간, 시간이 충분할 것이라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한 순간이면 충분하였다.


진료 대기실은 만원이었다. 앉을자리 하나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나와 같이 젊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부모님과 함께 온 어린아이들도 눈에 띄었고, 어르신들도 상당수 있었다. 놀란 속을 달래며 접수대로 갔는데, 아뿔싸! 평일 진료 접수는 3시까지만 받는다는 것이었다. 미리 전화를 해봤으면 좋았을 것만, 괜한 시간만 버리고 말았다. 나도 꽤나 마음이 급한데 말이다. 심지어 토요일에는 초진을 받지도 않는다고 한다. 와, 진료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면 그럴까? 마음 힘든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구나. 뭔가 새로운 세계를 엿본듯한 흥미로움과 함께 착착함이 떠나지를  않았다. 이들도 여기에 오기까지 얼마나 괴롭고 힘든 시간들을 보냈을까. 무엇이 이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일까. 저 아이는 어디가 힘든 걸까? 저 어르신은 어떤 어려움이 있으실까? 우리는 어쩌다가 이 사각 진료실 안에서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게 된 걸까.


결국 첫 정신건강의학과 방문은 그렇게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기분이 그리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쨌든 내가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싶었고, 병원의 문턱을 밟은 것만으로도 내가 앞을 향해 나아가려는 것 같아 스스로가 대견하였다. 그리고 진료를 기다리는 많은 분들을 보니 혼자가 아닌 것 같아 위로를 받았다. 단순히 나처럼 마음 힘든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서 위로를 받은 것만은 아니다. 그냥 조금은 이상하지만, 혼자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상에 덜컥 떨어진 돌연별이라 세상에 나 혼자라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었구나.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고 하면 이기적인 것일까.  


이제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이해했다. 다음번에는 더 일찍 와서 진료를 받으리라 다짐을 했다. 이번 주말만 잘 버텨보자. 회사 일이 바쁘더라도 꼭 점심에 퇴근하고 가리라. 눈치 볼 것도 없다. 일이 뭐라고 목숨을 걸겠냐? 나 없다고 회사 안 돌아가지 않는다. 아주 잠깐 삐그덕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순간이리라. 나 또한 수많은 톱니 중에 하나뿐일 테니 말이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나 자신이란 사실을 어느 순간 왜 잊고 있었을까.

이전 14화 심리상담 이후 정신건강의학과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