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사람은 그 정도도 견디지 못할 만큼 약한 것일까.
심리검사지는 두 종류였고, 문항수는 이전의 MMPI나 TCI보다는 적었다. 아무래도 진료 직전에 간단하게 환자의 현재 상태를 평가하는 목적이 아닐까 싶었다. 이어폰을 꽂고서 음악을 들으며 가볍게 검사지 작성을 완료하였다. 막상 여기까지 찾아온 것도 스스로 뿌듯하였지만, 진료를 받고 처방을 받고 하면서 나아질 나의 모습이 기대되기도 하였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곧 의학적으로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고 생각하니 상당히 홀가분하기도 하였다. 그간 심리상담을 받을 때까지는 우울한 사람이고, 불안한 사람이지만 나의 상태가 명확하게 병적 진단을 받는다는 것은 마치 선고를 받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었지만, 이제 올 것이 왔다 싶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대기하고 있었기에 1시간여를 기다린 후에야 겨우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초진이었기에 20~30분 정도 대화를 나누었는데, 앞서 사람들이 10분 내로 나오는 것에 비하면 확실히 첫 진료로 인하여 시간이 길어졌던 것 같다. 그간 지나온 이야기들을 조리 있게 설명하기 위해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차근히 생각을 정리했기에 말을 이어나가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여러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에 대한 후기를 봤을 때 시간이 촉박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봤던 터라 은근히 긴장이 되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푸근하게 대화를 찬찬히 잘 받아주셨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의 진료는 심리상담에서의 대화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던 점이 인상에 남았다. 검사지를 통해 간략히 내 현재 상태의 수준을 파악하고, 내가 설명하는 나의 상태들은 일종의 증상들로 분석이 되는 느낌이었다. 심리상담에서는 공감의 비중이 높았다면,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이해와 분석의 비중이 훨씬 높아 보였다. 그래서 뭔가 샅샅이 분해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묘하기도 하였다. 나의 상태들에 대해 점점 깊어지는 질문 수준에 조금 생각이 필요하기도 하였지만, 심리상담 때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내 상태를 상세히 그리고 여러 방향으로 묘사하는 것에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병증을 결정하는 조각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온 나의 진단명은 뭐 특별할 것도 없이 예상하였듯이 번아웃에 우울증이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나와 같이 성취 욕구가 높고, 자기 통제욕구가 심한 사람들이 요즘 들어 번아웃과 우울증에 많이 힘들어한다고 하셨다. 속으로 조금은 서글펐던 것이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을 성취하고 이뤄내려고 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고작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민폐 없이 해내겠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무너질 일이었을까. 나란 사람은 그 정도도 견디지 못할 만큼 약한 것일까.
치료 방향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은 꽤나 흥미로웠다. 언듯 주워 들었던 세로토닌과 도파민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이름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세로토닌은 감정, 수면, 식욕 등의 조절에 관여를 하면서 행복감을 느끼게 하므로 행복 호르몬으로 불린다. 반복적인 우울감과 무기력함은 세로토닌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세로토닌을 향상하는 방향으로 우선 투약을 받기로 하였다. 약에 대한 불안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사 선생님께서 먼저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기본적으로 Aripiprazole 계열의 아빌리파이, Vortioxetine 성분의 브린텔릭스, Benzodiazepine 계통의 로라반을 처방받았다. 각각의 사용 역할 및 목적은 간단히 다음과 같다.
- 아빌리파이 :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과 도파민의 작용을 조절. 정신신경계질환 치료.
- 브린텔릭스 : 우울증에 관여하는 세로토닌 등 신경전달물질의 활성을 증가.
- 로라반 : 불안, 우울, 불면, 긴장, 초조 등의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신경안정제.
의사 선생님께서는 우선 부작용이 적고, 의존성이 낮은 약부터 시작해 보자고 하셨다. 사람마다 효과가 좋은 약들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조합들을 시도해봐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상당히 낮은 용량을 처방받았는데, 일부 약물은 본인도 현재 낮은 용량으로 복용 중이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그 말을 들으니 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도 쉬운 일이 아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내 처지에 괜히 의사 선생님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약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듣고 나니 불안감도 많이 해소가 되었고, 어떤 변화가 있을지 조금 더 기대가 되기도 하였다.
이때, 선생님께서 내 마음을 어찌 아시고는 조금의 경고를 주셨다. 지금 투약해 주는 약들의 용량은 어떤 큰 변화를 가져올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은 것이 좋은 방향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변화가 느껴진다면 약 먹는 것을 중단하고 병원으로 다시 오라고 하셨기에 무언가 변화를 기대하던 나는 속으로는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현재까지 1년 8개월 넘게 병원을 다니며 약을 먹게 될 줄을 몰랐다. 길어도 1년이면 좋아져서, 약도 그만 먹고 괜찮아지겠지 싶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서 우울을 떼어놓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자, 이제 시작이다. 약을 먹어보자. 그리고 다시 한 발 내디뎌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