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약 세 알
너무 아무렇지도 않았다 보니 조금 김이 픽 새고 말았다.
한 달 분량의 약을 처방받고 인생 첫 우울증 약 복용이 시작되었다.
큰 각오를 하고 병원을 찾아가 약을 타오는 그 순간까지도 이런저런 상념에 마음이 복잡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게 된 걸까. 아직도 마음이 복잡하고 조금은 억울하기도 하였다. 왜 나는 이렇게 약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서 남들도 다 하는 마음고생 조금을 못 견뎌서 한없이 무너지고 스러졌던 걸까.
이 어둠에 끝은 과연 있는 것일까. 마음이 축축이 녹아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취침 전 내일은 좀 더 나아지겠지 기대를 품으며 세 알의 알약을 먹을 뿐이었다.
그렇게 첫날밤이 지나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이튿날이 되고 일주일이 지났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사실, 의사 선생님께서도 말씀해 주신 게 몸에 변화가 느껴지거나 혹시 기분의 영향이 느껴진다 싶으면 바로 병원으로 오라고 하신 거였다. 물론 처음이다 보니 용량을 굉장히 적게 하여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거라고 덧 붙여주셨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너무 아무렇지도 않았다 보니 조금 김이 픽 새고 말았다.
하지만, 분명 달라진 것은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우울과 불안을 견뎌내는 방식은 말 그대로 견디는 것이었다. 마치 턱끝까지 밀어닥친 밀물에 까치발을 들고 겨우 입만 내밀어 숨을 쉬는 것만 같이, 순간순가 치밀어 오르는 우울과 불안을 온몸으로 견디어 내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썰물이 밀려나가듯 수위가 가슴이나 배까지 낮아져 그나마 숨을 쉬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발목 아래까지 밀려나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기차고 씩씩하게 하루를 살아가곤 했다. 이 우울과 불안에 대한 나의 태도는 굉장히 수동적이었고, 필연적이었다. 거대한 자연재해와 같이 버텨 살아내야만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병원에 찾아가 상담을 하고 약을 처방받고 복용하기 시작하면서, 우울과 불안에 대한 나의 태도는 보다 능동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더 이상 우울은 내가 참고 견뎌야 하는 나의 원죄가 아니라 내가 조절하고 다스릴 수 있는 조금 나쁜 상황으로 인식되어 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일상의 영역에서도 조금씩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내가 불안하고 우울한 것이 내가 부족하고, 게으르고, 근성 없고, 나약한 정신 때문이 아니라 신체적인 호르몬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내일부터 다시 계획대로 살아야지, 다음 달에는 다시 잘 살아봐야지, 내년에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막연한 반성과 기대로 점철된 희망고문에 번번이 스스로를 던져왔었고, 또 상처를 받아왔다. 마치 가시덤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이 나는 부족하고 나약해 그렇기에 이렇게 우울하고 불안한 것은 당연한 것이야. 나의 무기력함과 게으름에 벌을 받는 거야 하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건 명확하게 나아질 수 있고 조절될 수 있는 부분이 되었다. 부족한 호르몬을 채우고 과한 호르몬을 조절하면서 나의 기분과 무기력을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막연하게 나아질 거라는 허울뿐인 기도가 아니라 보다 명확하고 특정하여 나의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해 나갈 수 있는 기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한 달간의 악 복용을 끝내고 다시 병원을 찾아갔다.
물론 앞서 이야기했지만, 대단하고 드라마틱한 마음의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떨어지는 낙엽에 괴로워하고 불어오는 미풍에도 살을 에여하였지만, 이전에 의사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덕분에 오히려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에 조금은 안도하기도 하였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동일하고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를 물으셨고,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는 나의 대답에 지금 처방한 약들이 잘 맞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조금씩 용량을 높여갈 거라고도 하셨다. 용량이 높아지면 더 나아질 수 있을까. 다시 조금은 막연한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기 시작하였다. 나에게 필요한 용량은 대체 얼마인 걸까? 얼마나 많은 용량이 나의 상태를 좀 더 나아지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올라가기 시작한 용량은 다시 낮아질 수는 있을 것인가? 결국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언젠가 상태가 나아져서 약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인 가였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에 불필요한 걱정과 염려는 잠시 미뤄두자. 지금은 지금의 나에게만 신경을 쏟기에도 벅찬 시간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