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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자란한뼘 Oct 21. 2024

이제 괜찮아진 것 같은데?

맞아,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지는 3개월만 있으면 만 2년이 된다.

길지는 않을 수 있지만 절대 짧지도 않은 시간이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대단하게 변한 것은 없다. 그냥 자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 정도. 컨디션이 한동안 좋을 때면 이게 약 덕분 인가 하고 갸웃거리는 정도. 간혹 다시금 상태가 안 좋아지면 과연 이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까 한숨이 나오는 정도. 겨우 그 정도였다. 


하지만 적응 단계로 시작했던 약의 용량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늘어만 갔다. 눈에 띄게 좋아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상태는 왔다 갔다 했다. 괜찮아지다가도 여지없이 무너져 내릴 때도 있었고, 바닥을 찍었다고 생각되면 한동안은 꽤나 좋은 컨디션으로 활기차게 살아지기도 하였다. 활기차게는 꽤 열심히 살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너무 애쓰지 말고, 열심히 살지 말라고 하셨다. 스스로를 너무 메어두지 말라고도 하셨다. 하지만 그게 하루아침에 바로 될리는 만무했다. 숨 쉴 틈 없이 꽉꽉 들어찬 다이어리 시간표를 하나씩 그어나가는 쾌감은 내가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내가 현재 복용 중인 주요 약의 용량은 이제 최고 수준 대비 60% 정도라고 한다. 10%로 시작했던 수치는 최대치의 반을 넘은 것이다. 누군가는 물컵의 반이나 남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반이나 넘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착잡했다. 마음이 바닥에 흐물흐물 눌러붙은 것 같았다. 애써 떼어놓아도 말할 수 없는 찜찜함이 남는 그런 기분이었다. '내가 나아지고 있는 것일까'하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들을 애써 휘저어내느라 바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난 내가 막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 생각하고 있다. 

이전에 이 이야기를 상담 선생님이나 의사 선생님께 했을 때 한소리를 듣고 말았지만, 

맞아,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물론 힘든 것도 맞고, 괴로운 것도 맞고, 결국에 도움이 필요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맞다.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고, 성가시게 가라앉는 우울감에 허우적거리는 것도 더 이상 한계라고 느꼈다. 이대로면 삶이 망가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그게 현실이고 사실이다.


문득 내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혹은 그렇게 생각하려고 무던히 애쓰는 것은 내가 심각한 상황까지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얕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어설프게 포장한 내 마음은 간간히 내 시선을 어지럽히곤 한다. 약 때문인데 마치 내가 다 나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러다 정말 내가 괜찮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꽤 평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영위하고, 담담하게 내일을 준비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내 상태를 과하게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제 괜찮아진 것 같은데? 다 나은 것 같은데? 약 필요 없어도 되지 않을까? 이런 마음으로 하루 정도 약을 안 먹어보게 된다. 그랬는데도 별 일이 없다. 별 문제가 안 느껴진다. 그렇게 착각 속에 빠져 야심 차게 약을 중단하고 다시 후회하면서 약을 찾기까지 걸린 시간은 5일도 채 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수치가 높은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었는데, 내 마음은 그 작은 고비에도 견디지 못하고 수수깡 혹은 성냥개비로 쌓아 올린 성과 같이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약을 멈췄기에 견디지 못한 것인지, 약을 계속 먹고 있었으면 잘 견디어 넘어갔을 일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일은 나에게 꽤나 충격을 주었다. 진심으로 요즘 컨디션이 좋다고 생각했고, 이렇게까지 무너져 내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다른 의미로 공포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약물의 힘을 체감한 것이면서도 그 영향력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함께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이 약물들이 점점 더 당연해지는 것이 아닐까?  


정확한 해답은 아직 모르겠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내가 현재 복용 중인 약들은 의존성이 굉장히 낮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는 하셨다. 그러면서 갑자기 약을 끊는 것은 안 된다고도 신신당부하셨다. 천천히 용량을 올려간 것처럼, 끊는 것도 천천히 용량을 낮춰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꽤 컨디션이 좋은 나날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었고, 다소 무모했지만 나에 대한 약의 영향력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다음번 진료 때는 꼭 용량을 한 번 줄여보자고 말해야겠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진료날을 기다릴 때마다, 마음속에 우울과 불안의 폭풍도 기다렸다는 듯이 몰아치는 것을 보면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오늘도 고민만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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