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러포즈 이야기
2024년 9월 29일, 결혼을 했다. 벌써 한 달도 더 지난 일이 되었다.
지난 과정들을 되돌아 볼 때, 즐겁고 설레고 행복하기도 했고 언제는 불안하고 날카로워지고 힘들어지기도 하였다. 우울과 불안을 치렁치렁 달고 사는 나이기에 작은 준비하나도 가끔은 벅차고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 중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것은 바로 '프러포즈' 였다.
주변에 꽤 많은 친구들이 결혼을 하였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다수가 결혼을 이미 확정하고 미루다 미루다 프러포즈를 겨우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정말 별로라고 생각을 했고 나는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 이야기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너도 결국 미뤄서 하게 될거라고 악담을 하곤 하였다. 많은 외국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과 순간에 프러포즈를 하고 싶었고, 프러포즈가 결혼 준비의 시작이 되어, 결혼을 약속하고 한 걸음씩 함께 걸어갔으면 했다. 프러포즈 자체가 하나의 선물이 되었으면 했다. 물론 의도는 좋았으나 문제는 역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다.
프러포즈에 대해서는 이래저래 고민을 많이 해봤다. 호텔방을 잡고 거기에다 명품가방이나 선물을 올려놓고 프러포즈하는 사진들을 꽤 봤는데, 정말 그런 프러포즈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을 해달라는 약속의 선물이 명품 가방이나 명품 선물이 되어야 한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 중에 저런 명품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결국은 글쓰기였다.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었다. 바로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많은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는 것이었다. 그녀와 나와 우리에 대한 이야기,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들, 내가 좋아하는 것과 힘들어하는 것까지 여러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었다. 그렇게 키워드들을 정리하고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단, 한 장씩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총 19가지의 키워드에 대한 글을 작성하였고,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
다음은 실제 편집했던 문서의 차례이다.
우선 사계절을 넣었다. 이는 크게 4개의 챕터로 나눠지는 느낌을 들게 하고 싶었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겨울을 시작으로 봄-여름을 지나 프러포즈를 하게 될 가을로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에 대해 적은 '시작'부터 내 개인적인 괴로움을 담은 '재능, 부끄러움, 불안, 무덤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담은 '책, 밴드, 서핑, 산티아고, 우주'가 있다. 마지막 키워드는 바로 '사랑의 시'였다. 그녀에게 진심으로 적어 내려 가는 사랑 고백과 약속으로 페이지를 채웠다. 많은 분량은 아니었지만, 이 책을 통해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약속하고 싶은지를 알게 해주고 싶었다.
다만, 계획했던 시간 내에 작성하기 위해서 꽤나 고생을 했다. 글을 천천히 쓰기도 하지만, 몇 번을 썼다 지웠다 신중하게 하다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가을이 넘어가기 전에 프러포즈를 해야 했다. 나의 프러포즈는 선선한 가을바람과 뉘엿하게 져가는 노을이 함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했던 프러포즈의 피날레였다.
책 제본을 인터넷으로 소량으로 맡기는데, 감개무량하였다.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책을 펴내는 것이었는데, 간접적으로나마 한번 경험해 본 것 같아 기분이 몽실몽실했다. 며칠 후 책을 직접 받았을 때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뿌듯함에 찌릿 거리는 그 감각은 천금을 주더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이었다. (솔직히 디자인은 너무 심플하게 해서 좀 촌스럽게 보이긴 했다.)
자, 이제 디데이를 정하고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자.
이벤트 꾸밈 세트와 풍선 등 집을 꾸밀 것들을 주문해 받았다. 프러포즈 당일에 반차를 내고 집에 일찍 와서 집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집 식탁 위에 흰 레이스 감싸고 이쁜 꽃들로 주변을 꾸민다. 그 주변을 반짝이는 플라스틱 초와 탐스러운 풍선을 여기저기 배치한다. 거기에 로맨틱한 음악이 빠질 수 없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옆에 설치하여 달콤한 노래를 은은하게 틀어놓았다. 그 식탁 중앙에는 책과 짧은 편지를 올린다.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나는 우리가 첫 키스한 장소에 기다리고 있을게. (약도)" 그리고 거실 구석에 원격으로 제어가 가능한 스마트 카메라를 몰래 설치하였다. 좋아, 이제 준비는 끝났다!
그녀의 퇴근시간에 맞춰 전화를 건다.
"내가 집에 중요한 서류를 두고 왔는데, 미안하지만 회사로 가져다줄 수 있어? 오늘까지 꼭 제출을 해야 하는데 지금 회의 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이야..."
다급하고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관건이다. 고도의 연기력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이 순수한 그녀는 나를 돕기 위해 집으로 달려간다. 나는 집 밖에서 핸드폰으로 스마트 카메라로 녹화를 준비한다.
'띠띠띠띡, 철컥-'
현관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오는 모습이 영상에 보이기 시작한다. 11월 초 오후 다섯 시쯤, 어느덧 해가 뉘엿이며 넘어갈 준비를 하고 집안에는 태양이 흘려놓은 붉은빛들이 스며들어있다. 그녀가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그녀가 한 발씩 거실로 들어올 때마다 가슴은 두 근 두 근을 넘어 쿵덕쿵덕 요동치기 시작한다.
순간 그녀가 집 분위기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흠칫거렸다. 한 두 발자국을 더 걷고나서 마침내 식탁과 주위에 펼쳐진 모습을 보고 눈이 동그랗게 켜지고 입을 틀어막는다. 비명 아닌 소리를 지르더니 두리번두리번 금세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기 시작한다. 아마 내가 집 어디에 숨어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난 거기에 없다. 난 우리가 첫 키스 한 장소에 가 있으니 말이다.
그녀가 여기저기 구경을 한다. 꽃향기도 맡아보고, 풍선도 만져보고, 초도 들여다 보다가 책과 편지를 발견하였다. 다시 한번 감격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열고 글썽이는 눈망울로 찬찬히 읽어보기 시작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아냐! 편지부터 봐! 시간이 없단 말이야! 조금 있으면 해가 진다고!!
"편지를 봐! 편지를 보라고!"
그 순간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카메라를 직시한 것이다. 맙소사! 그렇다, 전혀 몰랐다. 스마트 카메라는 소리도 전달이 되던 것이었다. 황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카메라를 보고 웃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편지를 펼쳐보았다. 그리고 내가 있는 장소를 확인하더니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가 나에게로 오고 있다.
내 인생의 여러 기다림 중에 이보다 더 설레는 기다림이 있었을까? 이 프러포즈는 그녀만의 선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선물이기도 한 것이었다. 서로가 행복해지는 프러포즈가 되었으면 했다. 프러포즈가 일방적이지 않았으면 했다. 나에게는 이 설렘과 기쁨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
나는 안 보이는 곳에 핸드폰을 설치하고 촬영을 시작하였다. 등뒤로는 꽃다발을 들었다. 초조하다. 1분 1초가 억만 겁 같이 느껴졌다. 사실 집에서 이 장소까지는 차로 15분 정도 걸린다. 조금 멀긴 하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첫 키스 장소에 프러포즈를 한다는 나의 서사는 완벽하기 때문이다. 인적이 없는 해안도로가에 바람이 기운다. 생각보다 조금은 거친 바람이 아쉽다. 아니다. 이 바람마저 기껍다. 시원하다.
아, 저 멀리 그녀가 보인다.
그녀가 손을 흔든다. 손을 흔들며 달려온다. 아이코 넘어질라, 천천히 오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서 와, 얼른 와!라고 속으로 외친다. 그녀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바람에 그녀의 머리가 흩날린다. 주변에 퍼져있는 바다내음 위로 노을빛이 포근히 내려앉는다. 모든 것이 아름다운 순간이다. 어느새 내 앞에 그녀가 도착했다. 나는 힘껏 끌어 앉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꽃을 전한다. 노을이 머리 위로 내린다. 세상이 노란빛으로 흠뻑 물들어간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무릎을 천천히 꿇는다. 품 속에서 반지를 꺼낸다. 그리고.
"나와 결혼해 줄래?"
그녀는 말 대신 연신 고개를 힘껏 끄덕일 뿐이었다. 다시 한번 그녀를 안고, 우리가 첫 키스를 한 그 장소에서 다시 한번 입을 맞춘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돼주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프러포즈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