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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원아 Oct 18. 2020

록스타를 만나다

한원아의 픽션집 - 2

이제 그만 놀아야겠다


퇴사 후 3개월쯤 지났을까. 슬슬 쉬는 생활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쉰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3개월 동안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찔끔찔끔 용돈 벌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짓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따로 가이드가 없으니 아침이건 밤이건 평일이건 주말이건 할 것 없이 클라이언트의 요구는 계속되었고 따져보니 내가 한 것에 비해 보수도 형편없었다. 직장인으로서 디자이너의 경험은 해본 적이 없어서 실제 직장에서 디자이너는 어떤 식으로 일을 하는지 잘은 모르지만 내 다음 커리어를 신입 디자이너로 하고 싶진 않았다. 왠지 그냥 '내가 원래 하던 것'이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이젠 그만 놀고 새로운 직장을 찾기로 했다.


지독했던 지난 1년 3개월 간의 회사생활을 반추하며 이번에는 '클라이언트를 섬기는' 대행사가 아니라 인하우스로 가고 싶어졌다. 인하우스의 마케터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작은 스타트업의 마케터로 입사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번째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박군은 레퍼런스가 많은 것 같아요


누구한테 들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발 담그다 보니 잡다한 경험을 많이 해보았고 이것이 곧 내 아이디어가 되었다. 그래서 이게 나에게 큰 장점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직장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것저것 다 해본, 그러나 깊이는 없는 제너럴리스트가 과연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오, 박제프! 새로운 이름이 하나 더 생겼네? 제프 베조스할 때 제프냐?"


내 명함에 마케터라는 글자와 함께 본명 옆에 소심하게 써져있는 'Jeff'라는 글자를 보며 록스타형은 말했다. 제프 베조스는 아마존닷컴의 창업자이다.


"아, 아니에요. 제프 베조스는 무슨! 그냥 할 거 없어서 고민하다가 좋아하는 가수 제프 버넷이 생각나서 제프라고 한 거예요."


제프는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쓰이는 내 영어 이름이다. 대개 스타트업은 직장 동료를 부를 때 직급 따로 없이 영어 이름이나 별명 등을 부른다는 것을 이번 회사에 들어오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 회사는 어때? 적응은 잘하고 있어?"

"일단 전에 다니던 회사 보다야 훨씬 좋은 것 같아요. 아직 적응은 계속하고 있지만 업무 방식이 되게 독특해요. 스타트업은 원래 다 이런가..."

"나도 스타트업 경험은 없어서 잘 모르긴 한데, 뭐가 독특한데?"

"뭐랄까, 다들 할 말 다하고 눈치를 안 본다는 것? 그러니까.. 그게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 오롯이 업무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모두 당당해요. 말을 하는 사람이건 말을 받는 사람이건 감정에 얽매이지 않아요."

"또..?"

"음, 엄청 빠른 의사결정을 하는데 체계가 없어요."

"체계가 없다고?"

"아, 이 체계가 없다는 게 나쁜 뜻이 아니라 이전에 다닌 회사에서는 뭔가 기획서를 작성하고 컨펌을 기다리고, 뿐만 아니라 회사 내 동료들끼리 간단한 커뮤니케이션도 이메일로 주고받는 식이었거든요. 여기서는 그런 게 없어요. 회사 전용 메신저로 '뭐 해보자', '이런 거 어떠냐'는 등의 논제를 누가 던지면 해당 글의 답글에서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일이 진행돼요."

"오호~?"

"지금 생각해보니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진행하던 업무 방식이 굉장히 비효율적이었던 것이죠. 사소한 커뮤니케이션도 복잡한 절차가 있으니..."


비록 아직 2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14일 간 느꼈던 생생한 현장 상황을 더듬어 보며 록스타형의 흥미를 돋우었다.


"어쨌든 적응은 잘하고 있나 본데~. 그런데 왜 이 형님을 보자고 하셨을까~?"

"아, 형 제가 무슨 용건 있을 때만 형님께 연락합니까? 그냥 안 본 지 오래돼서 보고 싶어서 연락드린 거죠."


록스타형은 내가 대학생 시절 처음으로 서울에서 대외활동을 시작했을 때 만났다. 우연히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그때 많이 친해졌다. 공교롭게도 록스타형 또한 마케터인데 아는 것도 많고 관심 분야도 많아서 현재 다니는 직장의 일 외에도 굉장히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난 지금도 여전히 같은 생각이지만 처음 록스타형을 봤을 때 슈퍼맨인 줄 알았다. 저렇게나 많은 것을 하면서도 끝까지 그 일들을 잘 마무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은연중에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록스타형은 모든 것에 '스페셜리스트'였다.


"형, 난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싶지 않아요."


다음 편에 계속



<가끔은 픽션>

: 누구나 한 번쯤은 회사에서 겪을 사실 같지만 사실 같지 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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