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흉내내기

PART_달리기

by Oneal Song

1. 오타루를 달린다.


산사에서 깨달음을 위한 좋은 도구는 비질이다.

산사 초입이든 대웅전 마당이든 가을이 되면, 겨울이 되면 천지가 쓸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계절 내내 쓸어야 할 것은 언제나 항상 그렇듯 마음이다. 내 마음.

가끔 인연을 접고 부처를 향해 고개를 들어 보고 싶지만 깨달음은 없고 스님의 길로 들어서기에는 나이가 많고 고기를 너무 좋아한다.

조계종도 스님이 되려는 자를 50이 넘으면 받아주지 않는다.


편의점 입구 앞에는 가로수 하나가 버티고 있다.

단풍나무다. 잎이 예쁘다. 가지도 건실에서 잎이 풍성하다.

어찌나 곱던지 가을부터 겨울까지 내내 잎이 떨어진다.

나는 오늘도 낙엽을 쓴다.

인도는 내가 쓸고 차도는 청소부 어르신이 쓴다.

“맨날 떨어지는 디 자꾸 쓸어요?”

어르신이 자기에게 일을 떠민다고 한 말하신다.

“글게요”

허리를 펴서 숨을 내쉰다.
“저도 사장이 쓸으래서 쓸어요.”

‘언제까지 쓸어야 하지? 낙엽이 다 떨어질 때까지?’

끝을 알 수 없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깨달음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 끝을 묻는 것, 질문은 결국 마지막 순간을 향해 가는 것이다. 끝에는 죽음이 있다.

낙엽은 순교이고 죽음이지만 다시 잎은 열릴 것이다. 그 잎이 그 잎은 아니질라도.


‘나는 언제까지 달릴 거지?’

달리다 별 쓸데없는 것을 묻는다.

‘힘 다 할 때까지?‘

과하다. 누가 알면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풀코스라도 뛰는 줄 오해하겠다.

주 삼회 하루 사십 분 정도 달리면서.

사십 분 뛰어야 오 킬로 정도 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달린다 고로 존재한다.’

어느 달리기주의자의 달리는 고백이다.

‘달리기가 그렇게 중요해?’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중헌지 아니 중헌지’

그것은 달리면서 찾기로 한다.

낙엽이 다 질 때까지

50대 러너는 혼자서 달린다.

달리기는 혼자서 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혼자서만 할 수 있는 운동은 아니다.

나도 달리기에 대해서 배우고 싶다.

배우는 과정에서 함께 달리는 동무-크루라고 요즘 젊은이들은 말한다-를 만나고 싶다.


혼자 배운다. 일생이 그랬다.

혼자 배우고 혼자 깨우치고, 그러니 배움도 늦고 성취도 더디다.

지금 달리기도 그렇다.

달리기 앱 하나에 의지해서 혼자서 배우며 달린다.

팔 주짜리 삼십 분 달리기 기초.

이 주짜리 삼십 분 능력 향상 달리기 중급.

앱에서 나오는 티칭을 따라 달렸다.

지금은 오십 분 달리기 훈련 중이다.

훈련의 목표는 쉬지 않고 오십 분을 달리는 것이다.

자세도 설명해 주고 부상 방지도 설명해 주고 매번 달릴 때마다 설명은 해주는데

내가 잘하고 있는지는 검증이 불가하다.


나는 이 시대가 경이롭고 놀랍다.

핸드폰이 얼마나 놀라운 건지 태어날 때부터 있던 세대들은 모른다.

아이팟이라는 mp3 재생기가 전화기로 변해서 아이폰이라는 이름의 핸드폰이 되고 핸드폰에서 전화 기능은 축소되고 작은 컴퓨터가 돼서 내 손에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달리기도 핸드폰에 깔린 앱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불만이지만 놀랍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기록의 저장이다.

앱에 내가 언제 어디서 달렸는지 다 기록되어 있다.

달리기 사초가 된다. 사초를 다듬어 정리하기만 하면 달리기 실록의 편찬이 된다.

달리기 사초史草

23년 3월 말, 나는 통영에서 달렸다.

나는 이 년 전 봄부터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신고 있는 나이키 보메로 16도 그때 쌌을 것이다.

나의 달리기 역사가 짤지만도 않다는 자부심이 생긴다.

그때 왜 달리고 있었고 왜 통영에 갔고 왜 통영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었는지 사초를 넘긴다.


고통의 시기. 상처의 시기. 절망의 시기. 삶이 꺾어지는 시기였다.

처음으로 혼자서 여행을 갔다.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떠난 여행이었지만 혼자라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힘들었다.

달리기 시작한 것도 혼자라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일 것이다.

통영 숙소는 마리나 리조트였다. 이곳은 통영 음악당 바로 옆이다.

가보고서야 알았다.

가보고 싶었던 통영 국제음악제가 열리는 음악당 옆에서 숙소를 잡은 것이다.

‘바보야 통영 음악제 하는 때에 맞춰 왔어야지’

‘몰랐지 그냥 무작정 왔지.’


일출을 보기 위해서 일찍 일어났다.

창 밖으로 바다와 해가 보였다.

일출은 편하게 숙소에서 보는 게 제맛이다.

바다도 그렇다 편하게 숙소에서 보는 게 제맛이다.

하지만 달리기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달리기 신발을 챙겨 왔다.

워치를 차고 신발을 신고 나간다.

앱을 열고 스타트를 누른다.
“잘 달려 보아요”

녹음된 목소리가 앱에서 나온다.

해변을 달린다. 낭만적이다.

소나기가 내린다. 비 맞으면서 해변을 홀로 달린다. 더 낭만적이다.

달리던 해안 도로가가 선명히 떠오른다.

통영 바다

어느 순간에 누군가를 만난다.

하츠코이(초연初戀)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다.

(하지메 마시데-처음 뵙겠습니다. 처음이란 뜻의 하츠와 코이비토(연인)라는 단어 코이의 합성어. 처음사랑.)

이십 대 초 시절에 헤어진 후 서른 살 너머 어느 지점에서 다시 조우하는 스토리의 멜로드라마다.

이 영화에 메인 테마송이 first love라는 노래다.

99년 일본에서 열아홉 살 소녀가 작사 작곡하고 불러서 대히트시킨 노래다. 이 노래를 바탕으로 만든 드라마다.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달린다.


삶의 굴절기에 누군가를 만나는 것.

인연이라는 의미는 그거다.

‘언제 누구와 또는 무언가와 조우하는가.’

나와 달리기의 조우, 만남은 나의 삶의 굴절과 연관되어 있다.

‘언제까지 달릴 거야?‘

죽을 때까지 달려야 하거나 달리다 죽어야만 멈출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춤추게 저주받은 거처럼 죽을 때까지 달리는 저주를 받은 걸지도 모른다.

누가 보면 평생 달려온 마라토너인 줄 알겠다.


하츠코이 영화의 배경 삿포로.

삿포로의 오타루로 달리기 하러 가고 싶다.

달린 후에는 스시 집에서 탄수화물을 보충하면 더 좋겠다.

오타루에는 두 개의 스시집이 있다. 영화평론가가 다큐로 알려준 스시 집, 피아노 요정이 알려준 스시 집. 두 곳에서 하나를 고를 필요는 없다. 두 곳 다 먹어보면 된다. 두 끼 연속 스시 먹는 것, 얼마나 좋은가.


나는 최저시급 노동자다. 편의점 월급이 빠듯하다.

사는 것은 놀랍고 경이롭다.

겨우 그거 버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오십 대 구직자가 일자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편의점 일도 감사하다.

내 인생의 이제 꿈은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처럼 사는 것이다.

일 시켜준 사장에게 주님의 영광 있으라.

오타루에 꼭 가지 않아도 된다. 방송으로 봐도 된다.

핸드폰으로 하츠코이를 틀어놓고 귀에 골전도 이어폰을 끼고 달리면 오타루 기분이 날 것이다.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가.

귀에 꽂지 않아도 소리가 들리고 오타루가 아니어도 오타루 기분을 내면서 달릴 수가 있다.

‘오타루를 달리다’라고 쓰고 한강을 달리면 된다.

달린다. 기록이 남는다. 사초가 된다.

추신: 오타루에는 나의 영혼의 여인 나카야마 미호의 흔적이 있다.

눈 밭에서 하늘을 보며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이제 그는 나이 먹기를 멈췄고 조만간 난 그보다 나이가 많아진다.

잘 지내십니까?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네. 잘 지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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