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한 뼘 소설 2

by 가을나무

“우리 다른 동네로 이사 갈 거야.” 수민이에게 이사란 수천 번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던 기적 같은 일이었다. 수민이는 새벽을 지새우고 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에밀리. 에밀리 킴으로 살 거야. 다시는 없을 전학 기회였다. 태어난 지 40년 만에 월급이 밀리지 않는 회사로 이직한 수민이의 아버지는 얼큰하게 취해 그곳에서 뼈를 묻을 거라 여러 번을 되뇌었다. 수민이는 관심도 없었던 미국 하이틴 드라마를 찾아보다 주인공의 빨간 머리에 눈이 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가 중학생이 웬 염색이냐며 기겁하자 수민이는 이마에 있는 상처를 가리켰다. 작년, 같은 반 남자애가 생일을 축하한다며 수민이의 이마에 미역국을 부어 생긴 화상 자국이었다. 수민이는 엄마를 슬프게 만들기는 싫었으나 이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수민이는 그저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고 싶었다. 여기서 말하는 평범함은 그저 마음 맞는 친구 한 둘에 적대적이지 않은 말과 행동들. 조금 어두운 피부색도 눈에 띠는 곱슬머리도 아임 프롬 애리조나 한마디면 그래도 다르게 대해 지지 않을까. 에밀리의 예상은 적중했다. 미국에서 왔다는 외국인 에밀리는 뾰족한 눈빛들에 ‘엄마가 필리핀 사람이에요’를 기어가듯 실토했던 수민이에 비해 비교도 안 될 환대를 받았다. 에밀리는 늘 자신의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했던 아이들이 앞에서 말을 걸어오니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중에서도 주영이는 외국인 친구를 만드는 것이 버킷리스트였다며 에밀리에게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탄탄하게 짠 세계관을 따라 에밀리는 그럴싸한 대답을 술술 내뱉었다. 학교가 끝나고 주영이는 브이아이피 석이라며 자신의 옆자리로 에밀리의 책상을 옮겼다. 에밀리는 주영이와 짝꿍이 되고 싶지 않았으나 거절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수민이의 생각보다 에밀리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영어 수업시간마다 그녀를 찾는 선생님 때문에 단 한 번도 해외를 나가본 적 없었던 토종 한국인 에밀리는 하루 종일 집에서 영어 발음 연습 삼매경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검은 뿌리를 빨갛게 물들이느라 두피는 남아나질 않았고 머리를 감을 때마다 흐르는 염색물에 비 오는 날이면 머리를 묶고 온 몸으로 우산을 부여잡아 머리카락을 지켰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에밀리에게 가장 힘들었던 건 주영이가 가장 앞줄, 늘 교탁 앞에 앉는 그녀를 부를 때였다. 주영이는 그녀의 피부가 너무 하얘서 재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반 아이들 모두 주영이의 짝사랑이 그녀를 좋아한다 소문난 것이 진짜 이유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주영이는 익숙하게 그녀에게 매점 심부름을 시켰고 그녀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일과라도 되는 것 마냥 하루도 빠짐없이 부지런하게도 주영이의 말을 따랐다. 에밀리는 어느 순간 자신에게도 우유를 쥐어주는 그녀를 볼 때마다 심장에 돌이 얹혀진 듯 속이 답답했다. 땡큐. 그녀는 에밀리를 빤히 쳐다보다 유어 웰컴이라 대답했다. 그녀는 에밀리가 딸기우유를 가장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고 주영이가 초코우유를 시켜도 늘 에밀리에겐 딸기우유였다. 땡큐 한 번에 돌 하나, 또 하나. 쌓여가는 돌무덤에도 에밀리는 에밀리로 남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파란색을 찾아볼 수 없었던 하늘 밑에서 주영이의 짝사랑은 그녀에게 고백을 했다. 주영이는 그녀에게 배고프다며 심부름을 시켰고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달려가 우유를 사 온 그녀의 정수리에 우유를 부었다. 그녀는 우유가 얼굴을 타고 흐르기 전에 눈을 감고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숨을 참았다. 주영이는 마지막 남은 방울을 그녀의 머리 위로 탈탈 털어내고 에밀리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학교 끝나고 옆 남고 애들과 노래방을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서 유행하는 팝송 코러스를 해달라는 주영이의 머리위로 에밀리는 그녀가 준 딸기우유를 부었다. 교실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는 주영이를 보고 도망 나가는 그녀를 에밀리는 주저 없이 따라나섰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서 에밀리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다홍색 물방울이 에밀리의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와 하얀 교복 셔츠를 물들였다.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내 이름은 수민이야. 김수민. 너... 그거 샤워 한 두 번해서는 안 될 거다.”

수민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근처에서 가장 큰 슈퍼로 향했다. 그녀에게 어울릴 가장 향기가 좋은 샴푸를 수민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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