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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론 Feb 16. 2024

중립의 역설

독후감: 다산의 마지막 습관



말해야 할 때 하고, 말하지 않을 때는 자제하고,숨기는 것 없이 진실하게 말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행동도 마찬가지다. 당당하면서도 나설 때와 나서지 않아야 할 때를 잘 구분해서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먼저 존중하면 반드시 존경으로 돌아온다. (P.194)

갈림길 앞에서 최악의 선택은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판단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고,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P.252)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 공부에 매진한다면 남의 결점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어진다.
밤낮으로 자신을 둘러본다면 누구나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반성하고 성찰하기에도 바빠 남을 둘러볼 여유도 관심도 없어진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자만한다면 남의 결점을 찾게 된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게 된다.
자신보다 모자란 사람을 보고서는 안도하게 되고, 또 쉽게 비난하기도 한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장단점을 따진다. (P.337)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중립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왔다. 이 편에도 속하지 않고, 저 편에도 속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지켜내는 강직한 사람. 사적인 관계보다는 진실과 정의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고 적절한 조언을 건네주는 사람. 적절한 중간 어느 지점에서 조화를 이루며 이쪽과 저쪽 사람 모두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부끄럽지만 이런 현실성 없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러한 중립적인 인간에 대한 나의 집착이 건강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든다. 다시 말해 실현이 불가능한 완벽하게 이상적인 인간상을 마음 한 편에 고이 박제해둔 것은 아닌지. 나아가 그 박제된 표본 때문에 이성적으로, 혹은 감성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어느 한 쪽을 분명히 선택할 수 있을 만한(혹은 선택해야만 하는) 사건 앞에서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딜레마에 휘말려 결국 때를 놓쳐 최선의 선택을 내리지 못하게 된 이후에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고른 후에도, '차선책이라니? 이건 내가 가장 중립적인 선택을 내리기 위해 고민하다 결정한 최선의 선택이야. 암 그렇고말고.'라는 식으로 그 불필요한 결단의 지연 과정을 합리화해온 것은 아닌지. 선택을 내리지 못해 이도 저도 아닌 중간 어딘가에 어정쩡하게 내던져진 부끄러운 상황을, '중립을 지켰다'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왔던 것은 아닌지.


실수와 예기치 않은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말아야겠다'라는 극단적이고 비겁한 스탠스를 취하고 안주해버린 것은 아닌지. 이런 비겁하고 소심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중립'이라는 멋들어진 간판을 들여온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중립. 나와 다른 이들과 부대끼며 그들을 알아가기보다는 '그들은 나와 다르니까 내가 관여할 필요나 이유가 전혀 없어.'라는 식으로 선을 그어버리는 냉소적인 중립. 중립에 대한 집착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집착을 던져내지 못하는 고집과 오만함.


'남들도 나같이 인간관계와 자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거야. 그러니 더욱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밖에 없지. 당연한 일이잖아?'라는 그럴듯한 배려의 가면을 쓴 자아도취를 언제쯤 벗어던질 수 있을까. 남들이 나와 같을 수도 있다는 희박한 가능성에 막혀 남들이 나와 다를 높은 가능성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역설.


독자적인 자아를 드러내기에는 타인들이 신경 쓰이고, 그렇다고 타인의 방식을 따르기에는 나의 고유한 것을 포기하는 것 같아 거부감을 느낀다. 어쩌면 그렇기에 인위적으로 자아와 타인의 중간 어딘가 지점에 '중립'이라는 푯말을 꽂아 넣고, 찝찝하게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쪽과 저쪽을 이해하려고도, 그리고 반대로 그들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 인위적으로 거리를 두는 행위가 진정한 중립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그런 어긋난 중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처지를 더욱 안쓰럽게 만든다.


어쩌면 진정한 중립을 실현한 이들은 오히려 나처럼 '중립'이라는 개념에 크게 연연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설적이게도 '가운데에 서는 것'이라는 중립이라는 단어의 뜻에 내포된 물리적인 개념에 연연하지 않아야 진정한 중립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때 중립의 실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고유한 자아를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자아와 타인 간의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중간점은 어디일까?


아차, 다시금 물리적인 개념으로 돌아와버렸다. 어렵다. 내가 중립이라는 개념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올바른 것을 판별한 능력과 그것을 실행할 추진력, 그리고 대척점에 있는 이들과 적당한 거리는 두되 아예 배척하지는 않는 포용력을 섭렵한 초인을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그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또다시 강박적으로 나와 타인 사이의 적절한 중간지대를 찾아 헤맨다. 이런 시행착오가 언젠가 '완벽한 중립'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 되기를 바라며.



다산의 마지막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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