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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론 Mar 11. 2024

생각의 감옥

독후감: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블레즈 파스칼은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며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에 비유했다. ‘생각’한다는 행위 단 하나로 인간은 지난 30억 년 동안 유지되어 왔던 생태 피라미드의 기본 원칙을 깨부쉈다. 단일한 ‘인간’이라는 한 종이 피라미드의 최상단에서 나머지 175만여 종의 생물들을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생물계의 최강자를 가리는 싸움에서 인간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인류는 허기와 맹수의 습격, 자연재해 등의 기본적인 생물들이 마주할 위험들을 피하거나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발전된 농업과 건축학으로 인류의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풍족해졌고, 화약의 개발과 탄도학의 발전으로 맹수의 습격으로부터 안전해졌다. 기상학, 기후학의 발전으로 신의 천벌로만 여겨졌던 자연재해도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이도 단 280만 년의 역사를 가진 인간이라는 단일한 종이  30억 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생태 피라미드를 붕괴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생각의 도움으로 예상보다 손쉽게 승리를 가져온 인류에겐 이후의 삶에 대한 청사진이 없었다. 모든 다른 생물과 같이 당시 인간에게도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살아남는 단 하나의 목적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승리를 맞이한 직후, 인간은 이후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내일은 뭐라도 먹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내일은 뭘 먹을까.’라는 생각으로 전환되었다. 생존에 직결되는 의식주(衣食住)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인간은 이제 ‘무엇이 옳은가?’, ‘어떤 것이 더 나은가?’와 같은 추상적인 가치들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가치에 대한 논쟁 중 비슷한 생각들이 모이고 모여 '사상'이라는 보다 큰 개념이 생겨났다. 사상은 생명도, 실체도 없었지만 그를 지지해 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힘으로 절대적인 권위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상을 상상의 영역에서 현실로 끌어낼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권력자들이 등장했다.


스탈린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지지했다. 그리고 그가 해석한 공산주의 사상대로 다른 이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 평등에 반하는 계급과 부의 소멸'을 목표로 삼은 공산주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은 통제와 억압을 받는 계층은 최하위에 있는 농민과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사상이 떠들어대는 어렴풋한 미래의 평등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자유마저 박탈당했다.


생각에서 태어난 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했다. 사상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었다. 생각하는 능력을 강탈당한 인간들은 다시금 피라미드의 최하위로 추락했다. 사상은 수많은 강제수용소를 만들어내고 그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넣고 도살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이 금지된 세상에 고립되고, 생각이 만들어낸 감옥에 갇혀 서서히 죽어갔다.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 강제수용소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죄수들의 삶을 그렸다. 그는 하루하루를 마지못해 살아가는 죄수들을 일과를 무덤덤하지만 아주 세밀하게 묘사해 특정 사상(전체주의)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비판의 슬로건을 직접적으로 내세우지 않았음에도,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마저 빼앗아간 수용소에서의 하루를 적나라하게 비치면서 우리 스스로 사상의 지배와 그 정당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한다.



이봐 내 말 좀 들어봐" 슈호프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자네들 흙손은 빨리 모아서 고프치크에게 갖다주라고 하게.
내 흙손은 계산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내가 나머지는 처리하겠어!"
(중략)
"반장, 여기 걱정은 말고 어서 가보게.
저쪽에서 반장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야!" (P.130-131)

알료쉬카도 돌아온다. 저런 녀석은 착하다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에게 항상 친절을 베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무슨 잔일로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녀석이니까 말이다.
"알료쉬카! 이거 받아!" 비스킷을 그에게 한 개 내민다.
"고마워요, 당신이 먹을 것도 부족할 텐데..."
"어서 들어!"
나 같은 놈이야 없으면, 또 뭘 해서든 벌이를 할 수 있으니까 상관없는 일이다. (P.207)

당장의 끼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매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수용소 밑바닥에서 담담하게 동료에게 비스킷을 건네는 그 손에서 고결한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더 이상 추락하려야 할 수 없는 가장 밑바닥의 삶도, 모든 것이 통제되고 검열되는 상황도, 인간의 가슴속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고유한 '선' 내지 '양심'의 호소는 결코 침묵시킬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자연에서의 속박에서 벗어난 인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가 만든 감옥에 자발적으로 들어갔다. 생각이 만들어낸 감옥은 자연의 위협처럼 즉각적이진 않았지만, 서서히 인간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나서야 우리는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이 만들어낸 감옥에 갇혀 생각할 자유를 박탈당하고 나서야 우리는 사상의 잔인한 모습을 직면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감옥을 부수고 탈출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자유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눈앞엔 불확실한 미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마치 처음 우리가 자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그 순간처럼 말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상상 속의 유토피아를 실현하려는 시도가 현실을 가장 비참한 지옥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천국을 꿈꾼다. 지옥을 꿈꾸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린 천국이 현실에서 지옥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역자 또한 이 사실을 통감했던 것일까. 그는 작품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끝마친다.




"이렇게 권력의 악용에 대한 사건들을 명확하고 철저하게 규명하는 것이 우리들이 할 일이다.
세월은 흐르고 우리들 모두는 사라질 것이며,
우리는 결국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동안에 밝힐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마땅히 밝혀야 하며......
이와 같은 비극이 앞으로는 절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P.214)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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