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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지기 Jan 28. 2022

내 어머니의 꽃 냄새를 맏는다


젊디 젊은 내 어머니의 꽃 냄새를 맡는다


비가 온다. 계절이 바뀔 때면 자연은 비를 쏟아 묵은 계절을 비워 낸다. 지금은 가을로 바뀌는 환절기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는 왠지 쓸쓸하다. 이런 날은 사각사각 벼 이삭 부딪히는 소리가 좋다. 자지러지는 풀벌레 소리에 잊힌 사람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가을은 이래서 뒤돌아보는 계절이다. 창가에 기대어 빗소리를 듣는다. 밀려오는 오래된 것들을 차 한 잔 마시며 토닥이고 있다.

며칠 전, 밤 산책길에서 달무리를 보았다. 그때 벤치에 아빠와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예쁜 딸이 앉아 두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며칠 이내로 비가 올 것 같다.”

“아빠 어떻게 알아?”

“달 주변으로 둥그런 원이 있지? 제게 달무리야”

“응, 아빠, 달무리 하면 비가 오는 거야?”

“아빠가 너만 했을 때 할아버지가 그랬어, 달무리를 하면 며칠 내로 비가 온다고.”


가을로 가기 위해 달무리를 하는 것이다. “달무리는 달 주위에 나타나는 동그란 빛의 띠로, 대기 중에 떠 있는 먼지나 얼음 알갱이에 의해 햇빛이 굴절, 반사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달무리는 ‘맑은 날보다는 구름 낀 날에 나타난다. 옛사람들은 ‘달무리가 있으면 비가 온다고 했다. 실제로 달무리가 나타나는 날은 비가 올 확률이 60~70 % 정도로 매우 높은 편이라고 한다.


바람 한 점 없이 비가 내린다.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숲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여치 울음소리가 숲을 덮쳤다. 잡풀 사이로 가을꽃과 여름꽃이 지천이다. 달맞이꽃, 짚신나물, 쑥부쟁이, 사위질빵, 둥근 유홍초, 물봉선, 무릇, 마타리, 상사화, 사광이아재비, 참취꽃, 이질풀, 며느리밥풀, 등골나물, 주홍서나물, 부추, 산박하, 땅비사리, 층층잔대, 좀싸리, 왕고들빼기, 닭의장풀, 새팥, 짚신나물 꽃들이 장관이다.

층층잔대 꽃을 작년에 만났던 그 자리에서 눈 맞춤을 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낯익은 발소리를 알아보겠다는 것일까. 유난히 허리를 숙였다. 층층잔대 꽃을 만나려고 며칠 동안 주변을 맴돌았다. 보이질 않아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십 여일이 지난 오늘에서야 마주했다. 반가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빗방울을 둘러쓰고 샛노란 꽃을 토해내는 마타리 꽃자리에서 귀를 모아 새소리를 찾고 있다. 숲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소곤거리는 듯한 소리다. 품 안에서 어린 새끼를 떼어내고자 자연의 냉혹함을 들려주는 걸까. 사람들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걸까. 아니면, 벌레 잡는 요령을 가르치는 걸까. 움직임은 없는데 새소리만 먼 곳에서 들려온다.


산길을 벗어나 촉촉해진 낙엽을 밟는다. 발아래 썩은 낙엽이 생명 순환의 법칙에 들어와 있음을 느낀다. 겹겹이 쌓인 낙엽이 썩으면서 새로운 생명에게 자양분이 되고 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죽음이고 소멸이다. 그러나 남겨진 것은 또 다른 생명의 에너지다. 결국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다. 


대지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물과 태양의 빛을 흡수하여 소멸한 껍데기에서 생명을 순환시킨다. 그러나 문명이 변화하면서 생명 순환이 자꾸만 끊어지고 있다. 인간의 편리만을 추구하는 과학의 시대가 지구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네게 주어진 자연이 나의 소유인 것처럼 남용한다. 지구는 나만 사용하고 끝나는 일회용이 아니다. 

지구가 오염된다는 것은 생명의 지속성이 소멸한다는 의미다. 식물이 번식력을 잃어 가면 결국은 우리의 생태계도 무너지고, 인간의 생명까지도 위협한다.

텅 빈 숲에 안개가 몽환적이다. 평소에 느낄 수 없는 다른 것에 사로잡혀 있다. 나의 이성이 자꾸만 현실의 사물을 벗어나고, 생각이 보이고, 침잠해진다. 사물이 그려지면서 허허로움에 사로잡힌다. 그러다가 산 밭에 고여 있는 흙냄새에 깨어난다. 

뭉근한 흙냄새로 온몸이 후끈거린다. 이 냄새는 고구마 밭에서 어린 나를 안아주던 내 어머니의 가슴팍에 고인 뜨거운 냄새다.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냄새다. 땀 냄새와 흙냄새, 어머니의 비릿한 젓 냄새가 버무려진 젊디 젊은 내 어머니 꽃 냄새다. 


코끝에서 창궐한 어머니의 냄새가 울컥 지나간다. 그리고 빛바랜 붉은 치마를 곱게 입은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다. 꽃 몽우리 맺힌 동백 가지가 내 어머니 혼례상에 올라왔다. 무병장수 굳은 약속 언약하며 제 몸을 태우더니 언제부턴가 그 동백, 앙상하게 메마르고 향기도 털어내고 기억마저 정지된 채, 서럽게 지고 있다.

이 비 그치면, 문득문득 삶의 궤적을 돌아보며 허우적거릴 것 같다. 자연은 생동을 멈추고 겨울을 준비할 것이고, 해맑은 나의 그림자는 짧아질 것이다. 가을에는 놓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붙들고 기도하고 싶은 가을이다. 더 이상 그림자로 남지 않기를 바라는 가을이었으면 좋겠다. 오늘처럼 가을바람이 어슬렁거리면, 나의 짧아진 그림자는 견디지 못하고 메마르게 필 것 같다.


                                                            @ 힐링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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