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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일영감 Sep 08. 2016

김성훈의 윤리, 영화 <터널>

#99 일일영감의 잡담


오늘 일일영감의 잡담에서는 영화 <터널>과 <끝까지 간다>을 연출한 김성훈 감독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뛰어난 서스펜스로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 냈던 <끝까지 간다>와 재난을 마주한 우리 사회의 메커니즘을 그려낸 영화 <터널>. 김성훈 감독의 두 작품을 모두 보신 분이라면 더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창민이 폭탄이 터지고 물에 빠지는 상황에도 죽지 않고 거의 사신에 가까울 정도로 끈질기게 고건수를 따라다녀도 여기에 리얼리티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은 <끝까지 간다>를 움직이는 동력이 고건수의 고군분투와 그에 따르는 서스펜스였기 때문이다. <끝까지 간다>에서는 고건수가 시신을 감추는 일과 박창민에게서 벗어나는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하느냐, 못 하느냐의 여부가 관객의 주요한 관심사였지 얼마나 현실적인 난관이 그에게 들이닥치는지는 그 다음의 문제였다. 그래서 박창민이 거짓말처럼 살아나 고건수를 찾아와도 관객은 '그런 상황은 불가능하다'고 평가하는 마음을 알지 못하게 억누르고 고건수의 승리를 기원하는 심리적 동요를 멈추지 못한다.

 


<끝까지 간다>를 연출한 김성훈 감독의 차기작 <터널>에서 환풍구 위치를 혼동하여 보름간의 시추 작업이 허사로 돌아갔을 때 나는 이것이 단순한 이야기적 장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세현마저 구조 작업의 포기를 동의한 상황에서 이정수마저 죽는다면 <터널>은 지독한 새드-엔딩의 영화가 될 것이고 <터널>은 그럴 만한 배포의 영화가 될 수 없으므로 그 결과 '어차피 이정수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매몰 '35일' 만에 이정수는 물과 식량도 없이 거짓말처럼 (당연히) 살아났다. 그러나 이미 예상된 결말임에도 <끝까지 간다>와 달리 <터널>의 리얼리티가 부정적인 방식으로 작용한 것은 다름 아닌 김성훈 감독이 이정수의 생존에 관하여 시나리오에 한 줄을 추가함으로써 너무나도 가벼운 방식으로 관여했기 때문이다. 물론 순진한 해피-엔딩의 영화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나는 <터널>의 결말이 순진할지언정 나쁘거나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성일 평론가는 <미스테리아> 7호에서 <곡성>에 관한 나홍진의 윤리적인 태도를 언급하며 서사의 내용이 아닌 형식이 사악해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 차악이 가능한 상황에서도 굳이 최악을 선택하는 서사의 작동 방식은 대중영화가 곧 예술 작품이고 예술 작품이 곧 대중영화임을 망각한 결과다. 작가의 거창한 윤리 의식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터널>의 결말이 차라리 희망적으로 느껴지는 건 적어도 사악한 작동 방식을 채택한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세월호 사건의 강력한 은유인 <터널>에서 사회적인 공감대를 위해서 이정수가 살아났든, 아니면 상업영화로써 대중적인 용인을 얻기 위해서 이정수가 살아났든, 김성훈 감독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의 순진한 선택에 대해 인지해야 한다.


글_ 정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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