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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일영감 Oct 27. 2016

증오하며 닮아간다는 것

#108 영화 <그물> (김기덕, 2016)

북에서 한 사람이 떠내려 온다. 직업은 어부, 이유는 배의 고장. 
사내들이 그를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간다. 창 밖의 풍경이 비치자 어부는 눈을 감는다. 
멀리 보이는 빌딩을 가르키며 사내들이 이야기한다. “저런 거 본 적 있어요? 한번 봐봐요”
그럴수록 어부는 눈을 더 질끈 감는다. 건물에 들어서서야눈을 뜬 어부에게 경호원이 이야기한다.
“일단 씻으시죠” 이에 어부는 언성을 높이지만 별 수 없다. 
그렇게 그는 욕실에 쭈그린 채 타국에서의 일주일을 마주한다. 


아래의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남한은 '남철우’에게 귀순을 종용한다. 그 방식은 ‘주는 것’ 이전에 ‘뺏는 것’부터 시작된다. 

먼저 그의 옷과 흔적을 빼앗는다. 그리고는 ‘돌아가겠다’는 그의 말과 자유마저 빼앗는다. 

남한의 좁은 방안에서 그는 잠재적 간첩이다. 그리고 북으로 옮겨가, 좁은 방안에서 그는 잠재적 정치범이다. 

두개의 좁은 방은 하나의 공간으로 겹쳐진다. 


두 국가와 두 이념은 희미해지고 그저 폭언과 폭력이 남철우의 심신에 오래도록 남을 뿐이다. 

증오하며 닮아간다는 것. 참 지독한 이야기다.



영화 <그물>의 동력은 국가의 이념이 아닌 개인의 이념이다

“내래 아무것도 보지 않겠습네다” 보는 만큼 불행해진다는 남철우는 다가올 불행이 곧 가족의 불행인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타의로 내몰린 서울 시내 한 복판에서 눈을 더 굳게 감는다. '가족'이 곧 그의 이념이다.  

자신이 세뇌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독재 체제’라는 꼬리표는 흐릿해지고 ‘남철우’라는 인간이 또렷해지는 순간으로 남는다.


조사원이 행하는 남철우에 대한 학대는 개인의 이념을 기저에 두고 있다. 민족의 고통(6.25전쟁)이 작고 단단하게 응축되어 개인의 믿음으로 자리잡았고 영화 속 조사원의 극단적인 불신으로 표현된다.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것 아니, 믿기 싫은 것. 그것은 곧 대상에 대한 증오로 나타나고 점차 증오의 대상과 닮아간다. 조사원은 자신의 믿음이 증명되지 못했을 때 목청껏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조국을 위한 사랑의 노래, 수백 번은 되뇌었을 애국가는 그의 불신과 증오에 대한 변명이다. 



관객은 경험한다. 남한의 자유는 조사관의 손에 들린 재떨이 앞에서, 북한의 공포스럽던 이념은 200달러 앞에서 희미해지는 것을. 허울이 사라지니 그제서야 인간이 드러난다. 


남철우는 결국 깨닫는다. 위대하고 거대하던 그 체재와 이념이 자신을 괴롭히는 장난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장난의 대열에서 이탈한다. 이탈의 벌은 무겁지만 이제야 자유롭다. 그가 견뎌온 것들과 저울질 하라면 무엇이 더 무거운지 가늠할 수 없다.  



자유를 강요하는 자유국가와 복종을 강요하는 독재국가. 두 갈림길의 종착지가 다를 수 없는 것은 필연적 사실이다. 감독은 이를 인간 중심으로 영화 전반에 걸쳐 증명하며 말을 덧붙였다. 

“분노만으로는 해결 될 수 있는 게 아니니. 객관성을 가지려고자 노력했다.” 


어느덧 영화의 마지막, 외롭게 흘러가는 남철우의 배는 빌려온 세계 속 희생된 개인에 대한 애도가 느껴진다.


글_ 최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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