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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일영감 Aug 27. 2016

부정할 수 없는 이 도시의 서늘함

#92 일일영감의 잡답, 영화 <서울역>


오늘 일일영감의 잡담은 영화 <서울역>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최근 1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부산행>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의 작품으로, 감독의 세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입니다.
<부산행>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어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서울역 (2016, 연상호)


1. 서울역 앞에서 두 청년이 복지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 청년은 ‘보편적 복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당장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인 듯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그리고 한 노인이 피를 흘리며 그 옆을 지난다. 청년 하나가 도와주려 나서지만, 그가 노숙자라는 이유로 이내 큭큭대며 등을 돌린다. ‘복지’와 달리 악취 풍기는 ‘노숙자’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극의 시작에 자리한 단편적인 상황은 이 영화의 갈 방향을 이야기한다.

피 흘리던 노숙자를 ‘형님’이라 부르던 다른 노숙자는 그를 돕기 위해,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 그의 부탁은 노숙자라는 이유로 대부분 벽에 부딪힌다. 그리고 서울역 어디엔가 쓰러져 있던 노숙자는 일어나 사람을 뜯어 먹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의 사회, 역사, 시대를 관통하는 서울역에서 시작된 바이러스. 그리고 점점 어그러지는 서울. 그 곳을 헤매는 가출 소녀 ‘혜선’과 그녀를 찾는 두 남자의 동선을 따라 영화는 흘러간다.


2. 건물이 빽빽히 세워진 서울에 내가 발 뻗고 누울 공간 하나 없다. 그래서 나는 서울역으로 나왔다. ‘노숙자들’은 영화의 주제와 가장 맞닿아 있는 인물이다. 살기 위해 지하 선로를 걷던 혜선이 한 노숙자에게 눈물을 보이며 말한다. “집에 가고 싶어요.” 그러자 노숙자가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난 돌아갈 집도 없어. 나도 집에 가고 싶다” 그리곤 바닥에 주저 앉아 나라 잃은 사람처럼 대성통곡한다. 

살기 위해서 길거리의 부동산, 지하도의 아파트 분양 광고를 지나야만 하는 이 도시에서 ‘내 집’ 하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무력감을 여러 가지 요소를 통해 영화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혜선과 노숙자를 비롯한 길거리의 사람들은 공포에서 도망쳐 나와 국가와 마주한다. 앞을 가로 막은 경찰 버스. 이윽고 들리는 총성. 보호받아야 할 대상에게 공격받는 상황이 펼쳐진다.

국가(國家)에는 家[집 가]자가 쓰인다. 이미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남은 집은 국가가 아닌가. 하지만 <서울역>은 마지막 남은 집에서 버림받는 처참함까지 담아낸다. 


3. ‘교실 안의 돼지로 표현되는 인물들’(<돼지의 왕>)과 ‘무지함으로 인해 착취당하는 시골 사람들’(<사이비>)까지. 연상호 감독은 한 사회 집단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묘사와 주제 의식이 분명하다. 또한 그의 영화에서 약자의 총구는 당연한 듯 ‘더 약한 자’에게 향한다. 일말의 여지도 없다. 영화<서울역>은 <부산행>과는 다르다. 우리 사회에 관한 확실한 하강의 이야기이다. 

<서울역>은 나의 도시를 서늘한 벼랑으로 만들고, 끝끝내 나를 그 아래로 추락시킨다. 하지만 이 어둡고도 축축한 경험이 내게 오래 기억될 이유는 이 도시의 서늘함을 부정할 수 없음에 있다.


글_ 최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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