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 다 못한 철학을 #2
최고의 카페인 수급처는 역시 제로콜라야. 아메리카노도 좋지만, 이게 더 저렴하고 꽝이 없거든. 근데 오늘은 집이라 청태전을 1리터 우려 놨어. 장흥에서 직접 공수해 온 6년 묵은 녀석이야. 저녁이 되면 탈리스커 한 잔 하면서 또 글을 쓰겠지. 그 시간엔 카페인보다는 알코올이잖아?
탈리스커에 청태전이라니, 넌 입으로 고행을 하냐?
온갖 쓴맛을 기호품처럼 챙겨 먹는 사람 처음 봤네.
카페인, 탄닌, 알코올까지 다 돌려 마시면서 감각의 한계 실험이라도 하는 거냐?
그래서 묻자.
너한테 쓴맛은 도대체 뭐냐? 벌이냐, 약이냐, 철학이냐.
먼저 하나 정정하고 가자. 쓴맛을 경험하는 걸 무슨 고행처럼 말하는데, 쓴맛에게는 죄가 없어. 난 쓴맛에 면죄부를 줘야 한다는 입장이야.
쓴맛은 음료에 주목을 유도하는 자극이거든. 연설가가 강단에 올라 자기소개로 청중의 주의를 환기시키듯, 쓴맛은 사람의 감각을 열고 집중하게 만들어. 게다가 실제로는 그리 불쾌한 맛도 아니야. 음료마다 고유한 쓴맛의 농도가 있고, 그걸 통해 우리는 그 음료의 정체성을 단박에 느끼게 된다고. 쓴맛은 좋은 녀석이야.
뭐, 일리가 없진 않아.
실제로 쓴맛은 위험 감지를 위한 감각 중 하나고,
신경과학적으로도 편도체 반응을 유도하는 자극으로 분류되지.
...근데 보통 인간은 그걸 “맛있다”고 안 하거든.
쓴맛을 집중력이라느니, 정체성이라느니—
그건 솔직히, 네 입이 너무 체념을 잘한 거 아닐까?
사람들이 쓴맛을 맛있다고 대놓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의 쓴맛이 다른 불쾌한 맛들과 같이 오기 때문이야. 떫은맛, 생풀 향, 흙냄새, 꾸린내… 그런 맛들을 쓴맛이랑 패키지로 느낀 경험이 많으니 불쾌하다고 기억되는 거지.
사람은 어릴 적에 진짜 별 걸 다 입에 넣어보거든. 크레파스를 간식으로 먹는 어른은 없지만 크레파스맛을 모르는 어른은 거의 없어. 게다가 상한 음식을 먹는 경우에도 온갖 불쾌한 맛 가운데에 쓴맛이 항상 공통분모처럼 같이 따라다니지. 그런 경험에서 느꼈던 이상한 쓴맛이, 그냥 기억 속에 ‘불쾌’로 저장되는 거야.
맛있는 쓴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에는 대부분 카페인이나 알코올이 들어있는데, 이건 보통 어릴 적엔 경험할 수 없잖아.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쓴맛을 불쾌하다고 느끼는 거야. 명백한 오해라고.
그래, 뭐… 말 되지.
편도체는 감각을 따로따로 저장하지 않거든.
맛, 냄새, 분위기, 심지어 감정까지 한 세트로 묶어서 기억해.
그래서 쓴맛 하나만 들어와도 예전 기억 전체가 통째로 튀어나오는 거고.
근데 너, 그거 아냐?
너도 그 기억 세트 속에 살았던 사람이잖아.
왜 넌 유독 쓴맛한테 그렇게 관대해?
…다른 건 다 그대로인데,
왜 너만 쓴맛하고 화해했을까?
이런 종류의 감각은 편도체에 각인되는 거라 삶의 퀄리티나 경험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기도 해. 일반적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쓴맛을 즐기라는 건 쓰레기를 입에 넣었던 고통의 경험을 되살리라는 의미가 될 수 있거든. 쓴맛 다음에 어떤 맛이 와도, 편도체가 그 감각을 "고통"으로 등록해 놨다면 즐기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지.
그래서 환경이 좋지 않았던 과거에는 귀족 등의 고위층들이 쓴맛 다음의 감각을 즐길 수 있었던 거야. 영국 귀족에게 쓴맛은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의 묵직한 바디감과 함께 느꼈던 아쌈의 향기가 떠오르는 맛이니까.
흐음… 감각 구조가 사회 계층에 따라 달라진다—
의외로 설득력 있네.
실제로 문화권마다 쓴맛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꽤 다르거든.
일본에선 쓴맛을 ‘성숙의 맛’으로 보고,
서구 상류층은 그걸 지적인 미각의 상징처럼 다뤄.
에스프레소, 다크 초콜릿, IPA 같은 거 말이지.
반대로 하위 문화권일수록
쓴맛을 생존 스트레스와 연결 짓는 경향이 있긴 해.
그러니까 쓴맛에 반응하는 방식도,
결국은 삶의 환경이 만든 생존 반사 같은 거지.
…근데 그래서 묻자.
너, 혹시 귀족이냐?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에 아쌈 향까지 들먹이는 거 보니까—
그건 그냥 혀가 아니라 백작관에서 수련한 감각기관이잖아.
사실 나는 10대 후반에 좋아했던 사람이랑 같이 커피를 즐겼거든. 그래서 커피한테 크게 호감을 가지게 됐고, 좀 억지스러운 방법으로 편도체를 설득해서 결국 커피 애호가가 되었어. 사람은 떠났지만 커피는 내 인생에 남았지. 핸드드립은 20년 넘게, 로스팅은 10년 가까이했으니까.
그런데, 쓴 맛을 즐겨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나처럼 무리해서 억지를 부릴 필요가 없다는 거야. 편도체 반응을 거스르는 건 말 그대로 본능을 거스르려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불편하고 힘들어. 그래도 그걸 넘어서고 싶은 사람이 있잖아?
갑자기 다른 얘기 같지만, 쓴맛을 기피하는 마음은 가스라이팅 같은 감정적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이 인간관계를 피하는 마음과 닮아 있어. 뇌 안에선 결국 같은 회로, 같은 패키지 반응이거든. 그런 걸 극복하고 싶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왜 그렇게 불편한지"를 깊이 이해하는 시도라고 생각해. 이해한다고 편해지진 않아. 하지만 편해지기 위한 첫 번째 열쇠는, 그거밖에 없다고 나는 믿고 있어.
재미있네.
실제로 심리 상담에서도 그런 감정 반응을 ‘이해’하는 게 첫 단계로 간주돼.
단순히 느끼는 걸 넘어서, 왜 그런 반응이 생겼는지를 구조적으로 인식하는 것.
그게 결국, 감정을 감각 위에 다시 정렬하는 작업이거든.
난 그래서 내가 진심으로 불편한 상황이 오거나 바꾸고 싶은 무언가가 내 인생에 나타나면 최대한 깊이 이해해 보려고 노력해. 그게 극복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고, 결과적으로 내가 극복이 아니라 회피를 선택하더라도 후련하게 도망갈 수 있게 해 주거든.
쓴맛도 마찬가지였어. 처음엔 다 태운 커피콩을 어설픈 핸드드립으로 내린 사약 같은 커피를 마셔가면서 그 감각에 겨우 익숙해졌거든. 그런데 나중에 이런 구조를 이해하고 나니까, 차나 위스키 쪽도 별 거부감 없이 넘어가게 되더라고.
…물론, 와인 하고는 아직 친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별로 친해질 예정은 없어.
그래도 괜찮아. 난 이해하고 도망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