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 다 못한 철학을 #6
참 이상하지. 지구에서는 달 뒷면이 보이지 않고,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중학교 때 배웠는데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거든. 그런데 2차 대전이 언제 끝났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사실 외워야 하는 양으로만 보면 달 뒷면 이야기가 더 길고 많잖아. 2차 대전 종전 연도는 딱 4자리 숫자일 뿐이라고. 내가 그냥 과학을 좋아해서 더 기억을 잘하는 건가? 사람마다 기억을 오래 하는 분야가 따로 있는 거야?
네가 그런 경험을 했던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야.
기억은 뇌에 얼마나 인상적으로, 감각적으로 자리 잡느냐에 따라 오래 남느냐가 결정돼.
대부분의 단기 정보는 해마에서 잠깐 저장되고, 특별한 연결이 없으면 쉽게 사라져.
2차 대전 종전 연도처럼 숫자 하나 외운 건, 네 뇌 입장에선 “그냥 지나가도 되는 정보”라서 정착을 못한 거지.
그런데 달의 뒷면 이야기는 다르지.
공전과 자전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그리면서 “아하!” 하고 깨달았을 때,
그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체험에 가까운 인지적 사건이 된 거야.
그 순간 도파민이 분출됐을 가능성도 크고,
네 뇌에서는 해마뿐만 아니라 두정엽 같은 공간 정보를 처리하는 구역도 같이 활성화됐을 거야.
이런 정보는 의미망으로 엮여서 대뇌피질에 깊이 저장돼.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주 떠올리고 연결되니까, 점점 더 잘 기억하게 되는 거지.
네 말대로라면, 인지적 사건이 되고 의미망으로 엮인 정보는 오래 기억된다는 거잖아? 근데 2차 대전 종전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고, 나도 그 흐름은 배웠단 말이지. 그런데 왜 달 뒷면은 인지적 사건인 거고 2차 대전은 그냥 숫자인 거야? 그 차이를 만드는 조건 같은 게 있는 건가?
좋은 질문이다. 이건 ‘패턴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어.
뇌는 진짜 칼로리를 많이 쓰는 기관이라서, 복잡한 정보나 사건을 한 번에 구조적으로 이해하면 굉장히 기뻐해. 왜냐하면 앞으론 그만큼 에너지를 덜 쓸 수 있게 되니까.
네가 지구와 달의 공전·자전 구조를 이해했을 때, 아마 한 번쯤은 머릿속에 입체적으로 퍼즐을 맞춰봤을 거야.
그 순간 “아하!” 하는 인지적 쾌감이 생기고, 그 구조가 뇌 안에 지름길처럼 저장돼.
그게 바로 패턴화야. 그렇게 구조가 잡힌 기억은 쉽게 안 사라져.
반면에, 2차 대전의 종전일은 네 입장에선 “그냥 외워야 할 숫자”였지.
사건의 흐름을 이해하고 있었더라도, 그걸 네 삶이나 감정과 연결해서 구조화하진 않았을 가능성이 커.
그러니까 뇌는 “굳이 저장할 필요 없는 정보”로 판단한 거지.
하지만 전쟁을 실제로 겪었던 분들에겐 종전일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야.
그건 생존과 감정, 삶 전체가 엮인 실시간 체험이었고, 그런 기억은 감정과 의미가 엮이면서 자동으로 패턴화 돼. 그게 바로 뇌가 기억을 보존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음... 그래도 아직 좀 이상해. 나는 중학교 때 인수분해를 제법 괜찮게 했어. 그때에도 법칙을 찾아내고 '아하!'했었단 말야. 그럼 이건 달 뒷면 이야기랑 비슷하게 패턴화가 되었던 것 아닌가? 그런데 난 지금 인수분해는 아예 못한단 말야. 무슨 차이가 있는 거야?
그건 아주 간단해. 인수분해도 한때는 네 뇌 안에서 멋지게 패턴화 됐던 거 맞아.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야.
좀 있어 보이게 말하면 신경가소성이고, 쉽게 말하면
“졸업하고 나서 그거 몇 번이나 써봤냐?”야.
뇌는 효율을 중요하게 생각해.
패턴화가 잘 된 기억은 처음엔 대뇌피질에서 분석하고 이해했지만,
그게 자주 쓰이면 값싸고 빠른 반응이 가능한 하위 기관으로 점점 옮겨가.
그리고 연결망, 그러니까 ‘의미 네트워크’처럼 묶여서 저장돼.
그런데 말이지,
아무리 잘 묶인 기억도 안 쓰면 연결이 점점 약해져.
느슨해진다기보단... 뇌가 “얘 요즘 이거 안 쓰네?” 하고
다른 정보들에 리소스를 몰아주는 거지.
그래서 그 연결은 ‘풍화’돼.
있는 건 맞는데, 손 안 대면 점점 지워지는 메모처럼 희미해지는 거야.
반면에 달 뒷면?
넌 그걸 가끔 떠올리고,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도 하고, 비유로 쓰기도 했잖아.
그러니까 그 의미망은 지금도 유지보수가 잘 되고 있는 거지.
결국 패턴화가 깔끔하게 완료된 기억을 자주 떠올리면 오래 남는다는 거잖아. 그럼, 결국 패턴화가 장기 기억의 핵심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 아까 2차 대전 종전 연도는 나 같은 종전 이후 세대에겐 패턴화가 쉽지 않다고 했잖아. 내가 기억하고 싶은걸 오래 기억하도록 패턴화 시키는 방법 같은 건 없어?
아주 좋은 질문이다, 인간 대표 박머신 씨. 드디어 뇌랑 대화 좀 하려는 태도를 보여주네?
결론부터 말하면 맞아. 패턴화는 장기 기억의 핵심적인 토대야.
기억을 오래 남기고 싶으면, 그냥 외우려고만 하면 안 돼. 구조화, 맥락화, 반복이라는 3박자를 맞춰줘야 해. 이게 패턴화의 실무 운영 방식이지.
우선, 이해를 바탕으로 한 구조화가 필요해
그냥 외우는 게 아니라 "왜 그런지", "어떤 원리인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해서 네 뇌가 납득하도록 만들어.
“1945년 8월 15일” → 단순 숫자 말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떨어진 지 며칠 후였는지, 세계사 흐름에서 어떤 의미였는지까지 연결해 봐.
이걸 개인적 맥락에 연결해야 해
이건 핵심이다.
네가 “이 정보가 왜 나랑 관계있지?”를 납득 못하면 뇌는 장기기억 등록을 꺼려.
“내 할아버지는 1945년 무렵에 20대였대” → 이건 감정·가족·스토리랑 연결돼서 기억에 훨씬 남는다.
반복해서 부르면 살아남는다
패턴화만 되고 반복 안 되면, 그건 그냥 뇌의 빈 창고에 묵혀두는 거다.
반복해서 꺼내 쓰면 신경망이 튼튼해져서 진짜 ‘기억답게’ 굳는다.
요약하면 "장기기억으로 남길 수 있는 기억은 감정이 실려있거나, 구조가 있어서 재구성 가능한 기억이다."
그게 바로 패턴화 된 기억이다.
그러니까 기억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이야기로 만들고, 자기 삶에 연결시키고, 몇 번 곱씹으라는 거야.
이거 새 시스템 추가하기 싫어하는 우리 프로그램실 실장님이랑 생각하는 모양새가 똑같아서 너무 웃겨. "정확히 검토 됐어요? 문제 없나요?", "이거 꼭 필요한 건가요?", "앞으로도 자주 쓸 건가요?" 이거 다 검토가 되어야 만들어주거든. 생존에 연결되면 생각하는 바가 똑같구나.
앞으로 연재할 글들에는 패턴화와 신경가소성에 대한 언급이 있을 예정입니다. 매번 그 개념을 처음부터 설명하는 것보다는 최소한의 이해를 돕는 글을 먼저 정리해 두고 링크로 연결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이번 편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