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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대화는 시작하기도 전에 피곤할까

권력과 책임이 어긋난 대화가 우리를 괴롭히는 이유

by 한조각

모든 대화는 에너지의 교환이다.


사람은 말을 하면서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고 내가 한 말이 상대에게


받아들여질지 / 거절될지 / 반박될지 / 무시될지


그 반응을 미리 예상한다. 이 네 가지 반응은 모두 대화를 시작할 때 이미 마음속에서 설정해 둔 에너지 회수 시나리오다. 실제 반응이 예상보다 좋으면 그만큼 기분이 좋아지고, 예상보다 나쁘면 기분이 나빠진다.


예컨대 내 말이 거절될 것을 이미 알고 말을 했었다면 상대가 거절해도 기분은 덜 상한다. 하지만 거절될 가능성을 전혀 상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절을 당하면, 가벼운 거절의 의사조차도 큰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다. 이는 거절 그 자체보다, 내가 믿고 있던 대화의 프레임이 한순간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런 식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서로의 프레임을 끊임없이 예측하고, 예측한 결과를 대화로 확인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예측이 맞다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이 안도감은 우리가 친밀한 사람들과 별 의미 없는 이야기만으로도 편안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다.




둘 이상의 사람이 만나서 소통을 하면 서로의 동의를 전제로 하는 가상의 프레임이 만들어진다. 이 프레임은 이후의 모든 대화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처음엔 서로가 당연하다고 공감하는 상식으로 만들어지는데, 예를 들자면 “물건을 사면 정해진 돈을 지불해야 한다”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경험과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프레임의 모양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가상의 프레임은 모여있는 사람들의 성격과 목적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오늘 밤에 보석매장을 털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은 윗 문단의 프레임에 전혀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서로가 동의하는 가상 프레임의 모양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모임의 권력자가 된다. 간단한 예시를 들어보겠다.


평범한 사무직 직장인 10명이 부장님과 함께 회식 자리를 가졌다. 부장님이 커피 하나씩 들고 해산하자며 동네 커피가게에 가서 커피 11잔을 주문했는데, 돈을 지불할 때가 되자 많이 주문했으니 깎아달라며 실랑이를 벌인다. 결국 한 잔 값을 깎아내고는 의기양양하게 회삿돈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며 커피를 나눠줬다. 마치 모두를 대표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 사람처럼. 10명의 회사원들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반박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커피를 받고 해산한다.


부장님은 이 회식의 가상 프레임을 마음대로 휘저었다. 사실상 나머지 모두는 그 생각에 동의한 일은 없지만 그 모임에 함께 하면서 반박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만으로도 동의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렇게 가상 프레임의 모양을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는 사람이 모임의 권력자가 된다.


이 회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가상 프레임 같은 이야기는 전혀 생각한 일이 없겠지만 부장님은 알찬 회식이었다며 기분 좋게 집에 돌아갔을 것이고, 10명의 회사원들은 찜찜한 기분으로 해산했을 것이다. 이런 이론적 배경을 전혀 몰라도 사람은 이 권력을 쥐는 것에 쾌감을 느끼고 권력에 강제로 편입되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느끼게 된다.




프레임을 만드는 사람은 통상적으로 권력과 함께 그에 따른 책임도 강요받게 된다. 만약 할인을 강요받았던 커피집 사장님이 화가 나서 “당신들한테 커피 안 판다”며 만들어둔 커피를 눈앞에서 다 버리고 내쫓았다면 회사원들은 웃음을 참느라 필사의 컨트롤을 했어야 할 것이고, 부장님은 큰 심리적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부장님이 한 잔 값을 깎아내면서 머릿속에 터졌던 도파민에는, 이런 위기를 잘 해결해 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성취감도 포함되어 있다. 비록 별 의미 없고, 자기가 자초한 위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대화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은 권력과 책임의 주체가 분리되는 상황에서 벌어진다. 예를 들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손님의 관계다. 이 둘의 관계에서 서비스를 책임지는 쪽은 점원이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손님에게 있다. 면접장에서의 상황도 비슷하다. 구직자 입장에서 면접결과의 책임은 자신에게 돌아오지만, 그 자리의 권력은 면접관들이 가지기 때문이다. 압박면접이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런 구도에서 기인한다.


이처럼 권력과 책임이 어긋난 대화는 개인의 성격이나 말솜씨와 무관하게 구조적으로 피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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