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전달물질 이야기 (2/3)
생존 확률이 높은 집단에 속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집단의 접착제 역할을 하는 옥시토신은 오랫동안 인간 사고방식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고, 지금도 우리 상식 속에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존재한다.
사람들이 왜 셀럽이 사용하는 물건을 따라 사는지, 혹은 재난 상황에서 왜 아이와 여성을 먼저 구하는지는 단순한 개인의 이득이나 논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만 바꿔보자. 셀럽이라는 상위 집단과 같은 소비를 공유하며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려는 욕구, 그리고 집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 종족의 재건을 위해 본능적으로 계산된 '보존 우선순위'를 생각하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이처럼 중요한 판단의 순간에 집단과 나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신경전달물질이 바로 옥시토신이다.
옥시토신은 뇌 안에서 생각의 경로를 결정하는 설계자 중 하나다. 우리 뇌는 잠드는 순간마다 낮 동안 자주 사용했던 생각의 방향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스스로 회로를 조정한다. 이것을 뇌과학에서는 '신경가소성'이라 부른다.
그래서 평소에 옥시토신 기반의 사고를 반복해 온 사람은 위급한 순간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행동한다. 예를 들어, 눈앞에서 모르는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할 뻔한 상황을 목격한다면?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지는 사람은 평소 그 사람의 뇌 회로가 옥시토신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하도록 단단히 굳어져 있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런데 앞서 설명했듯이, 옥시토신이 내 집단과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힘은 역설적으로 나와 다른 집단 사이의 벽을 더 높고 견고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편부모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라거나 '문신한 사람들은 위험하다' 같은 생각들, 즉 집단 바깥의 대상을 향한 본능적인 편견이 여기서 시작된다. 이런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이 글의 쟁점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아까 사고 현장에서 아이를 보고 반사적으로 몸을 던진 그 영웅이 동시에 이런 편견을 가진 사람일 확률 또한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타인을 향한 숭고한 희생과 낯선 존재에 대한 차가운 배척, 이 두 모습 모두 과학적으로는 옥시토신이 추구하는 '집단의 생존'이라는 같은 방향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편견을 버리기 위해 타인과 온정을 나누는 행위조차 그만둬야 하는 걸까? 옥시토신이 내 생각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면 우리는 영원히 편견의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이런 메커니즘을 '인식'한 시점에서 이미 그 관성에 제동이 걸리기 때문이다. 연결 고리를 아예 모를 때는 본능대로 흐르던 것들도, 그 실체가 드러나면 의심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 뇌가 옥시토신의 반대편에서 균형을 맞추는 '도파민'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옥시토신이 집단과 나의 경계를 허물어 '우리'의 생존을 도모하는 전략이라면, 도파민은 환경 안에서 나의 비교우위를 증명해 살아남으려는 전략을 취한다. 달리기 1위를 했을 때의 고양감, 어려운 퍼즐을 풀어냈을 때의 희열, 번지점프 순간의 짜릿함은 모두 도파민이 주는 재미다. 1등은 승리 그 자체이고, 퍼즐은 문제 해결 능력의 증명이며, 번지점프는 공포를 이겨낸 담력의 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파민적 사고방식은 논리적 정연함과 공정함을 극도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시스템이 공정해야만 내가 실패하더라도 원인을 분석해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도파민적 사고가 가장 혐오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편견'이다. "너는 편부모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 승부에서 이길 수 없다"는 식의 논리는 도파민이 추구하는 '성취와 개선'의 기회를 영원히 박살 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도파민적 사고방식이 훨씬 합리적이고 즐거워 보인다. 게다가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과도 잘 맞닿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집단 속에서 살아가고, 그 안에서 부딪히며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는 것은 도파민이 아니라 옥시토신이기 때문이다. 논리와 공정에 과하게 집착하는 사람들이 가끔 사회적 맥락을 놓쳐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모습은 미디어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무엇보다 도파민적 쾌감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바로 '이유가 있어야만 행복하다'는 점이다. 집단이 유지되는 한, 옥시토신이 주는 행복에는 거창한 이유가 필요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유대나 따뜻한 스킨십만으로도 충분히 안온할 수 있다. 하지만 도파민은 오직 '비교우위'를 점하는 그 찰나에만 행복을 허락한다.
더 큰 문제는 도파민의 기준선이 한 번 올라가면 결코 내려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계 신기록을 경신한 선수가 이전과 같은 쾌감을 얻으려면, 반드시 자신의 기록을 다시 깨야만 한다. 이처럼 행복의 조건이 가혹하다 보니, 도파민적 사고에 매몰된 사람들은 때론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비교우위를 증명하려 든다. 악플을 달아 타인보다 감정적 우위에 서려하거나, 순식간에 강력한 보상을 주는 도박이나 확률게임에 중독되는 식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편견의 옥시토신과 중독의 도파민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제정신'으로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난이도가 이렇게까지 높을 일인가?
하지만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다. 인간이 인간답게, 100년 가까운 세월을 무리 없이 균형 잡힌 상태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 몸이 준비해 둔 또 하나의 카드가 있다. 바로 세로토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