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늘도 서핑 예약이 있어 일찍 일어났는데 어깨가 뻐근했다. 보드에 엎드려 파도를 열심히 휘젓다가 근육이 무리한 모양이었다. 전날 서핑은 정말 재밌었지만 몸이 무거우니 두 번씩이나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적거리며 일어나 샤워를 하는데 그래도 바닷가에 온 김에 해야지 언제 또 파도를 타볼까 싶어졌다. 결국 어제와 같은 시간에 조식을 먹고 같은 길을 달려 서핑샵으로 갔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한 일이었다.
두 번째 강습이었기에 이론 수업 없이 선생님과 함께 바로 바다에 들어갔다. 구름이 껴서 물은 전날보다 시원했다. 막상 물에 들어오니 어깨가 아팠던 건 생각나지도 않았다. 파도가 다가오면 팔을 저어 나아가다가 타이밍에 맞춰 일어서서 균형을 잡았다. 다낭의 바다는 파도가 크지 않다. 서핑 초보자가 첫발을 떼기 좋은 곳이다. 한 번 해봤다고 전날보다 보드 위가 훨씬 편안했다. 자세를 잡고 일어나서 파도를 타고 해변가까지 가는 동안 등 뒤에서 선생님이 칭찬과 환호를 보내는 게 들렸다. 갓 시작한 일이 이렇게 능숙하고 편안한 건 처음이었다. 오늘 포기했으면 이런 기분도 없었을 거란 생각에 두근거렸다.
서핑을 마치니 어김없이 배가 고파진다. 한 시장 근처에 있는 안토이 레스토랑은 이번 여행에서 기대했던 곳 중 하나다. 서핑 강습 때 만난 사진사 친구가 베트남 음식 중 미꽝을 추천해 줘서 시켜 봤는데 진한 국물에 든 면을 해물과 야채를 곁들여 먹는 게 정말 내 취향인 요리였다.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 식당인지 가족들도 모두 만족하고 주변 테이블에 한국인들이 많았다. 다낭에 다시 가도 여기는 한 번쯤 더 먹으러 갈 것 같다.
식사 후 더위를 식힐 겸 콩카페에 갔다. 다들 점심식사를 마칠 시간이어선지 빈자리도 없고 2층까지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신기하게도 여기서 동아리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코코넛 커피 스무디를 하나씩 마셨다. 차가운 스무디를 마시며 에어컨 아래에서 쉬었더니(이 카페가 그렇게나 붐비는 이유이기도 하다) 좀 기운이 났다. 그런 김에 아빠와 동생은 여기서 쉬게 두고 엄마하고 나는 마지막으로 한 시장을 다시 다녀오기로 했다. 옷과 샌들은 이미 샀고, 후추를 사고 싶었지만 적당한 걸 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베트남의 각종 소스를 안 산 게 아쉽다. 그리고 공항에서 아치커피를 몇 통 샀는데 한 시장에서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판다고 한다. 사실 공항에서 파는 과자와 커피 대부분은 한 시장에서 반 이하의 가격으로 팔고 있는 것 같다.
카페에서 나온 우리 가족이 갈 곳은 링엄사였다. 영흥사라고도 하는 이곳은 선짜 반도에 있어 다낭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20분 정도 가야 한다. 링엄사에는 약 30m 높이의 해수관음상이 있어 미케 비치에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서핑하면서 찍은 사진에도 작게나마 하얀 관음상의 모습이 찍혔다.
베트남에 있는 내내 덥긴 했지만 하늘만큼은 최고였다. 이날도 날씨가 맑아 새파란 하늘 아래서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계단을 장식한 용 외에도 여기저기서 동물 모습을 본뜬 조각상들을 볼 수 있다. 사찰 앞 넓은 터에 분재들이 줄 맞춰 늘어서 있는 것도 초록 지붕과 어우러져 멋졌다.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는 동물들도 볼 수 있다. 개들이 문간에 편안히 앉아 있거나 모여서 밥을 먹고 있었다. 야생 원숭이도 크고 작은 녀석들이 꽤 여러 마리 돌아다닌다. 원숭이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원숭이들은 밥을 얻어먹지 못하는지 쓰레기통에서 먹을 만한 걸 찾는 중이었다. 빈 과자 봉지를 뒤지다 성과가 없자 기분이 상했는지 가까이 가려던 어린아이한테 화를 내기도 했다. 뭔가 먹는 모습을 보고 왔으면 마음이 편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어쨌든 너무 가까이 가지는 않기를 권한다.
기대했던 해수관음상과 드디어 마주했다. 사진을 여러 장 찍었지만 그중 해수관음상 앞에 낮달이 자그맣게 떠 있어 이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든다.
링엄사를 돌아보고 나서 우리는 택시를 타고 다시 다낭 시내로 돌아왔다.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마사지를 예약해 뒀다. 예약 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링엄사를 걸어 다니며 다들 더위에 지쳐 있을 때라 스파 대기실에서 쉬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베트남 스파에 가면 으레 주는 생강 과자와 차를 마시며 지친 몸을 쉬었다. 이제 마사지가 끝나고 나면 집에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사지가 시작된 뒤에도 지난 사흘간 뭘 했나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나의 두 번째 베트남 여행. 계획이 틀어지고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 적도 있었지만 후회할 만한 건 없었다.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좋아진 것 같다.
졸다 깨다 하며 이번 여행을 되돌아보다 보니 90분이 순식간에 갔다. 마사지가 끝나고 나서 나온 코코넛 칩이 너무 맛있어서 두 봉지나 샀다. 그리고 우리는 벱꿰라는 식당에 가려고 했지만 라스트 오더 시간이 지나 포기해야 했다. 대신 한 시장 근처 거리의 아무 쌀국수집이나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고수가 필요하냐고 묻기에 부탁했더니 한국에서 먹던 것과는 다르게 생긴 이파리가 작은 바구니에 한가득 담겨 나왔다. 특유의 화장품 같은 향 잎을 국물에 몇 장 넣었다. 가족들은 질색했지만 나는 한국 쌀국수집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이 향과 맛이 너무 즐겁다.
이젠 정말 집으로 돌아갈 시간! 가족 모두 짐을 챙겨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뜻밖에도 택시 기사님이 한국어를 수준급으로 잘하는 분이셨다. 센터에서 3개월 아주 조금 공부했다고 하셔서 신기할 정도였다. 나도 3개월 만에 외국어를 저 수준으로 할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재밌기까지 하신 분이라 공항 가는 내내 가족 모두가 신나게 웃으면서 왔다. 그동안은 넷이 택시를 타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할 때도 많았는데 마지막이라 그런지 이런 경험도 즐겁고 떠나보내기 아쉽기만 했다.
탑승 수속을 전부 마친 우리는 공항에 있는 기념품점을 몇 바퀴고 돌았다. 나트랑 여행 때 마지막 날 엄마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공항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비행기를 탔던 게 한이 맺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남은 동을 탈탈 털 생각이었다. 대부분 시장에서 훨씬 싸게 살 수 있는 것들이긴 했지만 간식거리를 한 아름 싸들고 오니 기분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쓸 목베개를 사고 나니 공항에서 3시간이나 걸어 다닌 후였다. 아침 6시에 일어났고 오전 1시 반에 출발하는 비행기였으니 하루를 정말 꽉 채워 놀았던 셈이다. 엄마 말로는 나는 목베개를 메고 좌석에 앉자마자 비행기가 움직이기도 전에 꿀잠에 빠졌다고 한다.
비행기가 흔들리는 것 같아 잠깐 깨서 비몽사몽 한 채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 말고는 기억이 없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무사히 다낭에서 집까지 도착했다! 모두가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기에 동네에 돌아오자마자 24시간 콩나물 해장국집에 가서 뜨끈한 콩나물국밥을 먹고 와선 곯아떨어졌다. 우리는 엄청 돈독하거나 서로 없인 못 사는 가족은 아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거창한 사건이나 감동적인 관계 진전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우리 넷끼리만 이렇게 하루 종일 붙어 다녔던 적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그 시간이 즐거웠고 다음번이 있길 기대하고 있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