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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갑 Dec 19. 2021

고통의 안쪽

그냥 덮는게 좋은 게 아닙니다.

“분노하고 짜증내는 겉모습 안에 고통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을 빨리 건드릴수록 문제 해결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베스트 셀프>의 저자 마이크 베이어가 자신의 저서 초반부에 설명한 부분이다. 우리 모두는 내면에 각자 나름의 분노 버튼을 가지고 있다. 용의 수염처럼 건드리면 안되는 그런 분노 버튼말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의 존재를 잘 모른다. ‘그냥’ 화가 난다고 생각한다. 외부의 영향으로, 어떤 일때문에, 누군가가 나를 짜증나게 하기 때문에 등등…


하지만 뭐든건 이유가 있다. 분노에 ‘그냥’은 없다. 분노는 2차 감정이기 때문이다. 분노는 1차 감정이라는 감정 이후에 찾아오는 2차 감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1차 감정은 무엇일까. 억울함, 슬픔, 두려움 등이다. 그렇게 따지면 화가 난 건 그냥 화가 치솟았기 때문이지 무슨 슬픈 감정이나 두려움때문이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내가 글쓰기가 그 1차 감정을 찾아내는 최적의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들 자신의 감정을 말로 꺼내기 어려워한다. 상담을 받아보라고 하면 더더욱 꺼린다. 비싼 상담비를 낼 만큼 여유가 없다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여유가 있다하더라도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터놓는다는 것 자체를 꺼린다. 그렇다고 내 문제가 해결이 될까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예전보다 상담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진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미국 영화에서 자주 나온 것처럼 카운셀링이 모두에게 힙한 문화가 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우린 상담을 받는다고 하면 일생일대의 대단하고 무겁고 비참한 사건이 있어야지만 상담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나는 참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경험 하나 없으면서 상담이 절실했고 그걸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으니 말이다.


나의 6년간의 상담이야기는 그렇다치더라도 나는 사실 나의 반쪽의 분노 버튼에 관심이 있다. 착하다는 것과 분노는 그다지 큰 관련이 없다. 착하고 마음이 여려도 분노 버튼이 여러 개일수도 있는 것이고 성격이 유하지 않아도 분노 버튼의 존재를 잘 이해하고 잘 컨트롤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분노 버튼의 위험도는 자신에 대한 이해, 즉 메타인지와 관련있다는 생각을 요새 하게 된다.


자신이 무엇을 싫어하고 힘들고, 아니면 뭘 좋아하는지 모르면 자신의 분노 버튼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그 분노 버튼이 눌렸을 때 폭발한다. 그리고 왜 화가 났는지 모른 채로 다시 그걸 반복된다. 이게 참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힘든 일인데 나도 조마조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엉뚱한 곳에 화를 표출할 때가 종종 있다는 걸 느낀다.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에게 말이다. 화나 짜증이라는 게 아이들에게는 더 예민하게 전달되는 법이다. 표정은 화나지 않았어도 목소리 톤에서 이미 짜증이 느껴지는 걸 아이들은 기가 막히게 캐치한다. 아이들은 최고의 관찰자이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 만 7년이 되어가는데 나는 뭐했나하는 죄책감도 든다. 이 사람은 자신의 분노 버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내가 이게 맞는지 물어보면 아니라고 말한다. 끝까지 아니라고 한다. 근데 또 말해보면 아니다. 스무고개하는 것 같아 피곤하다. 자신의 분노 버튼이 무엇인지 알면 주위에 온화하게 주의를 줄 수 있다. “나는 이럴 때 힘드니까 조금만 이해해줘.”라고 말이다. 그럼 주위 사람도 안심하게 된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은 이럴 때는 이랬는데 다른 상황일때는 또 다르게 행동한다. 참 알 수가 없다. 다 큰 어른이 다 큰 어른을 관찰하고 분석하게 생겼다. 지금 먹고 살기도 바쁜 데말이다.


이러니 서로를 이해 못하는 가족들이 늘어나는구나 싶다. 가족이라고 같이 산다고 서로를 자동으로 잘 알게 되는 건 아니다. 서로의 분노 버튼이 무엇이고 무엇에 깊은 상처가 있는지 알아채주는 포용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그걸 스스로 알아채면 가장 베스트이고.


자신에 대해 자기가 가장  알아야 하는데 모른다는   슬픈 일이다. 자신의 잠재성이 무엇이고 자신의 최고의 자아, 자신의 반자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어쩌면 되게 불행한 삶으로의 추월차선을 타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걸 모르면서 돈을 벌겠다느니 행복을 찾겠다느니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모르는데 어떻게 자기 잠재력을 발휘할 것이며 시간을 자신것으로 만들 것이며 몰입을  것이란 말인.


티끌모아 자존감, 자존감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해서 돈공부를 지나 시간을 버는 방법, 그리고 습관이란 자동시스템에 대해 연구하다보니, 이제는 분노 버튼과 메타인지와 몰입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내가 아직 찾지 못한 나의 분노버튼은 무엇일까.


그리고 질문하고 싶어진다.


당신의 분노 버튼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자신의 분노 버튼의 위치를 잘 알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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