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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갑 Dec 02. 2020

참 이상한 이야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진심으로 믿는 것

나에게 하나의 믿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모든 아이는 예술가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모든 아이는 사랑스러워, 소중해, 아이들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해라고 말하고 싶은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


성선설을 말하고자 하냐고 한다면 그렇다는 쪽에 가까운데 그런 이야기를 다 떠나서 나에게는 아이들이 희망이고 미래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지금의 무기력한 어른들이 많아진 것은 자기자신을 자신있게 사랑하고 믿어주지 못한 어른들이 아이들을 키워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도 나빠서가 아니라 부모로부터 건강한 자존감과 사랑을 받지 못해서 서툴고 불완전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는 완벽하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자라면서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인 부모로부터 받은 건강하지 못한 사랑으로 조금씩 빛을 잃어간다.


사실 지금도 어른이 된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존재다. 하지만 그걸 자기 스스로 믿지 않는 것뿐이지. 믿지도 않지만 실력을 키우려고 하지 않아서 스스로 자기 가능성을 깎아내리는거라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 믿는대로 살 수 밖에 없다. 슬프게도. 나 자신이 나의 가능성을 묶어두고 있다는 걸 믿기 싫겠지만 사실이다. 내가 이런 상황인 것은 이런저런 상황들때문에 주위 환경때문에 나의 가능성이 없어진거라 분해하겠지만 어느정도 맞는 말이지만 또 어느정도는 그렇지 않다.


우린 난민 신분도 아니고 총기가 허용된 나라에서 태어나 무자비한 테러에 노출된 것도 아니며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 또는 그와 비슷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내 미래는 암담하고 더 나아질 것 같지 않고,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이것만 나아지면 내 삶은 훨씬더 나아질텐데라는 안타까움에 둘러싸인채 하루하루를 버틴다.


만약 우리의 이런 부족한 자존감이,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주지 못하는 열등감이 나의 탓이 아니라면 우린 누구탓을 해야하는 걸까. 당신들의 아픔때문에 건강한 사랑을 주는 법을 알지 못했던 부모를 탓해야 하는걸까. 그 분들도 또 다른 피해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윗 세대로부터 내려온 끊을 수 없는 고리는 어디서 끊어내야 할까. 사실 그 고리를 끊어내는건 지금 이 순간도 가능하다. 결국 선택과 태도의 문제다.


같은 환경에 처해있어도 누군가는 자신의 상황에

매몰되는 반면, 누군가는 그걸 발판삼아 일어난다.


우린 고난속에서도 사랑이 가득하고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 대단한 일을 한 이들의 성공담을 듣는다. 하지만 그건 그저 영웅의 이야기고 나와는 관계없는 잭팟 맞은 별나라 이야기쯤으로 여긴다. 그들은 아이 자체다. 무한한 가능성을 두 손 가득 쥐고 세상으로 나온 아이 자체다.


온갖 역경에도 그 안의 빛을 잃지 않은 아이다. 그런 아이는 흔치않다고는 생각한다. 그 어떤 사람이 주위에서 온갖 욕설을 해도 자기안의 빛을 잃지 않고 자신을 계속을 사랑할 수 있을것인가.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아이가 될 수 있다. 그런 아이였을 때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음악일 수도 있고 미술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고 인간이 만든 예술품일 수도 있고 어떤이의 말이나 글일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내가 왜 아이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다 알고 모든 빛을 가지고 태어나 점점 그 빛을 잃어가며 어른이 된다는데 확신하는지 그 근거가 있다.

우리가 모든 걸 알고 그 모든 아름다움을 이미 알고 태어난 것이 아니면 왜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새로 접했을 때 '그래, 이거야'라는 느낌을 받을까.


우리는 처음 보는 것일지라도 우리에게 감동주는 모든 것을 처음 접하면 감동과 함께 '그래 내가 원하던 것이 이거였어'라는 걸 직감한다. 이건 누가 알려줘서도 아니고 그냥 내 안에서 느낀다. 바로 '이 것이다'라는 느낌 말이다.


우리가 처음 보는 걸 보면 그저 '이건 뭐지?'라는 마음과 함께 호기심이 일지, '그래 이거야!'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린 모든 아름다움을 알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뭔가. 우리가 감동했을 때 그 아름다움을 찾은 것이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라면서 점점 흐려지고 가려진 빛을 다시 본 것이다. 커튼을 걷어낸 것이다.


조심스럽지만 참 이상한 이야기지만 이게 내가 믿는 종교다. 그 어떤 종교를 믿지 않고 믿을 생각도 없는 이유는 종교라는 틀안에 많은 아픔과 상처를 주는 모습들을 봤기 때문이다. 진짜로 종교가 대단한 것이라면 그 어떤 사람도 포용해줘야하고 받아들여줘야하는 데 내가 본 종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분쟁과 전쟁과 반대를 위한 반대들은 사라졌겠지.


나는 아이를 낳기 전부터 한시라도 빨리 아이를 낳고 싶었다. 생명의 신비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중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대단한 일 중에 하나일테니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었다. 사실 키운다기보다 내가 옆에서 지켜보는거라는게 맞는 말일수도 있다. 나는 단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보호자이고 스스로 일어나고 스스로 숟가락을 들어 입안에 먹을 것을 넣기 전까지의 보호자. 그 이후부터는 내가 지켜봐주고 오히려 내가 배움을 얻는 존재로서 아이와 함께 있는 기쁨을 느끼며 지내려고 한다.


이 기쁨과 놀라움은 글로 표현해내기 참 힘들다. 그저 느끼고 감사하는 수 밖에.


창밖에 햇살이 너무 따뜻하다. 감사한 하루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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